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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고?
안타깝게도 모든 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墨子(묵자)가 兼愛(겸애)를 주장하면서 “내 아버지 네 아버지 구별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고 했더니 孟子(맹자)는 그를 無父(무부)한 자라고 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실까? 그것은 인간들의 막연한 바람일 뿐, 성서 속의 하나님은 너무도 선명히 편애하시는 하나님이다. 카인과 아벨 중에서 아벨을 사랑하셨다.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고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서 이삭을 사랑하셨다. 야곱과 에서 중에서 야곱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다.” (출 33:19)
하나님의 사랑,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마라.
그분은
“극성스레 원수를 갚으시는 하느님,
성급하게 원수를 갚으시는 신이시다.” (나훔 1:2)
하나님은 노골적으로 편애하시는 하나님이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변덕스럽기 까지 하신 하나님이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죄도 못 본 척 어물쩍 넘기시는가 하면 죄 같지도 않는 죄를 죽음으로 다스리시는 분이다. 이런 변덕스런 하나님을 어찌할까? 하나님은 정서적으로 불안한,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힘이 엄청 센 그런 어린아이다. 그래서 힘없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어 주고 하나님을 열심히 달래주지 않으면 안 된다.
요나는 니느웨성을 멸망시키시려는 하나님을 이렇게 달랜다. 성서에는 하나님께서 요나를 달래시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내 눈에는 요나가 하나님을 달래는 것으로 보인다.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으시어, 악을 보고 벌하려 하시다가도 금방 뉘우치시는 분...” (요나서 4:2)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마라.
그분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모두를 구원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으신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나님을 불쌍히 여기자.
하나님의 무능하심을 용서하자.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때의 매정하심을 용서하자.
장성한 자식은 부모를 불쌍히 여기듯 그렇게 하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심히 섭섭해 하시고 심히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몽니도 부리고 보복도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연약하신 분이시기에 성숙한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불쌍히 여겨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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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덕쟁이 하나님, 무정한 하나님이 회개했다.
비로소 사람을 보았다. 사람에 대한 연민이 솟아올랐다.
그동안 당신께서 행하신 횡포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 죄를 속죄하고자 그분은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죽으셨다.
예수께서 위대하신 것은 그분께서 기적을 행하심이 아니다.
부활해서도 아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너무 커서다. 사랑이 크니 아픔도 크다.
사랑이 큰 만큼 늘 아픔의 삶을 산다.
예수의 사랑이 큰 것은 마땅히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이들을 사랑해서다.
일본의 승려 신란은 말했다.
“하나님이 선한이도 사랑하시거늘 하물며 악인을 사랑하시지 않겠느냐?”
- <십자가 묵상 4> 65-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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