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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 이스라엘
신명기 6:1~9
“이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가르치라고 나에게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입니다. 당신들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이것을 지키십시오.”(6: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과 율법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이 실현되어야 할 공간은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지금 광야 길을 걸어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가능할까요? 물론 아닙니다. 공간적으로 말씀이 실천되어야 할 곳은 가나안이지만 시간적으로는 그 말씀을 받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명령 수행은 유효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다음에 성공하면 착한 일을 많이 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실천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혹 후에 성공하더라도 착한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지금 좀 어렵고 힘들더라도 꾸준히 선한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나중에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도 본심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육신의 장막을 떠난 후에 누리는 곳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누려야 합니다. 그 나라는 먼 미래의 어느 날에 실현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실천하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놓치니까 교회가 미신화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목회자를 양복 입은 무당이라는 조롱을 세상으로부터 받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광야는 가나안처럼 살아내는 의지가 필요한 공간입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6:4~5)
인류의 타락은 관계성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에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창 3:10). 애정과 신뢰의 대상이었던 인간 관계는 책임 전가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창 3:12), 다스려야 할 자연은 인간에게 고난과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창 318). 이렇게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우선적 사랑에 의해서입니다(창 3:21). 이 사랑을 힘입은 이들에게 주님은 ‘쉐마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인간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사람 귀한 줄도 알고, 자연의 질서도 소중히 여깁니다. 인류의 대표성을 갖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깨진 모든 관계성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회복됩니다. 모세는 이를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것을 명령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6:6~7)
주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겠습니다. 원수 조차도 따뜻한 시선으로 보겠습니다.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시대,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풍토에서 주님의 사랑에 터해 살겠습니다.
2024. 1. 14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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