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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8:1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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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79138 |
설교보기 : https://youtu.be/HiPuvA_AL90
성경본문 : 마태복음 18:15-20
도반 공동체
, 창조절 1주, 2023년 9월 10일
우리가 읽은 설교 성경 본문에는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벌어질 법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5절은 이렇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어떤 교인이 교회 안에서 말썽을 일으켰을 때 처음부터 교회 전체에 공론화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고하라는 겁니다.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우선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그가 그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자기 생각을 바꾸면 다행입니다. 자기 고집을 꺾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인 총회의 결정을 거부하는 겁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을 ‘이방인이나 세리’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일종의 출교입니다.
17절에 ‘교회’라는 단어가 연달아 나옵니다. 헬라어 ?κκλησ??의 번역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면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마 16:18) 말씀하실 때도 나온 단어입니다. 이 용어는 예수 당시가 아니라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에 유대교의 모임인 회당과 구별해서 그리스도인 모임에 붙인 겁니다. 이 단어가 소급 적용된 이유는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후대의 상황을 그 이야기에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대의 에클레시아, 즉 교회 모임에는 오늘 본문에서 거론된 문제들이 실제로 종종 벌어졌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가 보통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예루살렘 교회가 모범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당시의 교회에도 오늘 교회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그대로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오늘 우리가 볼 때 사소한 문제로 서로 다투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마가 요한을 대동하느냐를 놓고 갈라졌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이런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그래도 교회는 달라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취미생활을 하는 동호회가 아니며, 돈벌이를 위해서 모이는 이익단체도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데도 온갖 인간적인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게 이상하기는 합니다. 일반 교회가 아니라 출가 수도자들이 모이는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 공동체는 상처가 없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걸 우리는 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교회를 말할 때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합니다. 보이는 교회는 지상의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천상의 교회이며, 보이는 교회는 역사 안에 있는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역사를 초월하는 교회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전투 중인 상처 많은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이미 승리한 완전한 교회입니다. 지금 우리가 구체적인 공동체로 모이는 이 ‘보이는 교회’에는 인간적인 한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건강할 때도 있고, 건강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을 때도 있으나 조롱받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듯이 말썽을 피우는 형제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아야 하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구원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니까 우리는 극도로 겸손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18절에 특이한 표현이 나옵니다. 마 16:19절에는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 말씀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교회 공동체 전체에게 주는 말씀으로 나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매고 푼다.’라는 표현은 관용어입니다. 교회가 결정하면 모든 게 무조건 선하다거나 허락된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 결정에 이르는 과정이 하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처리하는 과정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우선은 아무도 모르게 개인적으로 만나서 설득하고 권고해야 합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겠다는 태도로(마 18:22) 설득해야 합니다. 그가 들으면 ‘형제를 얻는’ 기쁨이 있습니다. 권고가 통하지 않으면 두세 사람이 함께 가서 설득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교회 안에서 공론화해야 합니다. 교회 말도 듣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출교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은 사랑에 근거해야지, 민폐 끼치는 사람을 속 시원하게 처리했다는 식이면 곤란하겠지요. 이런 공동체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었기를 기도해야겠지요.
19절은 ‘다시 이르노니’라는 말로 이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19절 전체를 읽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시라
죄를 지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와 동떨어진 구절처럼 보이겠으나 실제로 같은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을 처리하는 두 번째 단계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두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죄를 범한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득하는 일이 하늘에까지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이 ‘두 사람’이라는 표현은 20절에서 다시 나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중에 계신다.’라고 말입니다.
에클레시아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교회의 공동체성’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최종 권위가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있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저는 교회로 번역된 헬라어가 ‘에클레시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에클레시아는 ‘불러 모은다.’라는 뜻의 헬라어 ?κκαλη?(에칼레오)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용어는 교회가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 쓰던 용어입니다. 영주가 지역 대표들을 소집하면 대표자들이 모입니다. 그 모이는 과정을 가리켜서 에클레시아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나중에 그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교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이는 공동체’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인식은 지금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공동체성이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위기입니다. 하나는 현대인의 특성이 개인주의로 변해간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은 다른 사람과 엮이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철저하게 사생활이 보장되어야만 편안하다고 느낍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일반적인 주거 형태인 아파트가 전형적입니다. 일단 자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면 이웃과는 차단됩니다. 층간 소음으로 입주자들 사이에 다툼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도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기보다는 자신들의 사생활을 방해하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대인의 특성으로 인해서 교회 생활도 개인주의적 경향이 점점 더 뚜렷해집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예배만 드리고 싶어 하는 신자들이 늘어납니다. 저도 목사가 아니라면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형교회에는 어쩔 수 없이 이런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이 구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교회 안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겁니다. 알아도 일부만 아는 겁니다. 담임 목사도 신자들을 다 알아보지 못합니다. 가장 적당한 교회 크기는 담임 목사가 신자들을 다 알아볼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인들끼리도 서로 알아보면 더 좋고요. 역설적으로 대형교회에서는 개인의 익명성이 보장되기에 지성적이고 개인적이면서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그리스도인들이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양극화 현상이 심해집니다.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의 사용 증가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스마트폰은 사용하기에 따라면 유익하고 편리한 점이 많으나 거기서 벌어지는 문제도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카페 풍경을 상상해보십시오. 4명의 젊은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중입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대화하다가 조금 지나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스마트폰을 들여야 봅니다. 현대인에게는 스마트폰의 세계가 현실이기에, 그리고 그걸 통한 온라인 관계에 치우쳐 있기에 공동체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상을 다르게 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SNS로 얼마든지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현대인이기에 현대 문명을 통해서 공동체성을 찾는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서로 마주 보면서 말하고 상대의 표정도 읽고 그 사람의 생각에 반응하는 교감이 없는데도, 삶에 대한 공동의 경험이 없는데도 공동체성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샘’ 교회는 온-오프 병행 교회를 지향합니다. 이게 얼마나 가능한지는 우리가 아직 모릅니다. 우선 현장 예배에 오는 교인과 온라인으로만 접속하는 교인 사이에 공동체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아직 확실한 답을 찾진 못했습니다. 저도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긴 하나, 그 문제는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현장 분위기를 정확하게 느끼기 어렵습니다.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경험이 부족합니다. 교인들끼리의 친교도 원활하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온라인 교인과 오프라인 신자가 ‘투 트랙’으로 가야 하는 걸까요? 기술적인 방법은 어떻든지 중요한 사실은 교회 ‘공동체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다루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바울은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갑니다. 핵심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체끼리의 배척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발이 손이 아니라는 이유로 몸에 붙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약한 지체가 오히려 요긴하다는 사실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런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에 충실할까요? 아니면 단순한 종교 동아리에 불과할까요?
‘도반’ 공동체
교회는 공동체성만으로 교회다워지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교회다운 공동체로 만드는 근본 토대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이 그걸 말합니다. 19절은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20절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과 ‘그들 중에’ 있겠다고 하신 예수님이야말로 교회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 토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서 따라야 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를 저는 ‘도반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도’를 함께 따르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도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길입니다. 교우는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이니 도반입니다.
이런 교회의 성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예배 의식은 성찬 예식입니다. 교회는 곧 성찬 공동체입니다. 성찬 예식에 필요한 소품은 빵과 포도주입니다. 가장 소박한 먹을거리입니다. 빵을 나눠서 함께 먹고, 포도주를 함께 나눠서 마십니다. 요즘 우리는 포도주를 직접 마시지 않고 빵을 포도주에 찍어서 먹습니다만, 그 의미는 똑같습니다. 가장 소박한 먹을거리를 함께 나눠서 먹음으로써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표상을 밥상 공동체라고 보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우리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우리 모두 산티아고 순례를 함께 나선 사람처럼 도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생명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옆에 있으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도반들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교회 생활에서 기쁨 충만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같은 길을 함께 간다는 말이, 즉 도(道) 중심의 삶이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난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도반 공동체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가장 핵심적으로 상품 논리로 작동하는 이 시대정신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성찬 공동체라는 표현이나 도반 공동체라는 말은 모든 걸 돈과 경제적 이익으로 여기는 이 세상의 자본주의 논리에 대한 저항을 가리킵니다. 이런 설명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돈이 많아야만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만하고, 교회에서도 인정받으니까, 더 나아가서 돈이 넉넉해야만 다른 사람도 도와주면서 살 수 있으니까 이윤 추구를 중심으로 하는 이 세상의 상품 논리, 또는 자본 논리가 그리 잘못된 건 아니라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돈 많은 거 자체가 문제는 물론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재산 증식을 매도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공동체성을 깨뜨린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세상살이에서 다른 분야는 몰라도 의료와 교육과 종교에서만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료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분야입니다. 교육은 사람이 사람다워지도록 계몽하는 분야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영혼 구원을 담당하는 분야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의료마저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육도 사람다움보다는 돈 잘 버는 기술과 스펙 쌓는 데로 떨어졌습니다. 종교도 성장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에 종사하는 모두가 그런 건 아니나 오늘날 전체 흐름이 그렇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알아도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니까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속도만 다르지 그렇게 따라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이 모인 도반 공동체입니다.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무리 가난한 교회라 하더라도 성찬은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예배하고 성찬에 참여할 두세 사람은 있겠지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계시는 곳이면 열 명이 모이는 교회와 만 명이 모이는 교회 사이에 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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