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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47 추천 수 0 2024.01.25 19: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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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1:33-46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80592 

jys.jpghttp://dabia.net/xe/1080592

설교보기 : https://youtu.be/gSrAY4-JUY4 
성경본문 : 마태복음 21:33-46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21:33-46, 창조절 6주, 2023년 10월 9일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압축한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원수 사랑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모든 사람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야겠지요. 그런데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과 평화로이 지내지 못했습니다. 평화로이 지내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당신들은 위선자라.’고 그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신 적도 많습니다. 예수께서 삼십 대 초반의 나이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데에는 그들과의 갈등과 대립이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수께서 불교 창시자 싯다르타처럼 그들에게 좀 더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런 고초를 겪지 않았을까요?
 
포도원 농부 비유
 
오늘 설교 본문은 예수께서 겪은 갈등과 대립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 21:33-41에는 ‘포도원 농부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포도원 울타리를 치고, 즙 내는 기계를 설치하고, 들짐승을 감시하는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는 농부들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농부와 주인에게 돌아가는 몫이 4대6인지, 5대5인지, 6:4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주인은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당시에 흔했던 부재지주입니다. 포도를 거두는 시기가 되자 주인은 계약한 대로 자기 몫을 받으려고 하인을 포도원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하인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주인은 더 많은 하인을 농부들에게 보냈으나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두려워해서 계약 건을 정상으로 처리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농부들은 상속자인 그 아들을 제거하면 자신들이 유산을 차지할 수 있다고 작당했고, 그대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 포도원 농부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무엇에 대한 비유인지 알게 됩니다. 주인이 두 번에 걸쳐서 보낸 하인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선지자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비유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는 산헤드린 재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들이 대제사장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태가 활동하던 시절의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들은 바리새파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도 모자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제거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인물들이라고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류 역사가 점점 더 선한 쪽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퇴행하거나 제 자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비유에 나온 농부들의 그 욕망과 난폭성이 21세기 인류 역사에서도 반복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인류 역사에 대해서 비관적인 편입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살게 되어도 우리는 만족할 줄 모르거든요. 승부 욕망이 우리를 자극하고 지배하거든요.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는 일들이 오늘도 반복되는 겁니다. 아벨이 먼저 문제를 일으켜서가 아니라 가인의 내면에서 끓어오른 질투심이 그런 존속살인을 저지르게 한 겁니다. 언젠가 지구 생명체와 인류의 멸망은 인류 자신에 의해서 일어날지 모릅니다. 인간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핵무기와 핵발전소와 인공지능 등등, 인류 멸절을 가능하게 할만한 수단들만 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철부지 아이가 폭탄을 손에 든 형국입니다. 인류 자체를 보면 비관적이나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저는 여전히 낙관적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현실이 되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41절이 말하는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이겠지요. 이 다른 농부들은 원래 계약을 맺었던 농부들을 대신해서 새롭게 포도원 운영을 책임 맡게 될 것입니다. 43절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대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다시 강조했습니다. 그 열매 맺는 백성은 곧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누군지를 정확하게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곧 본문이 말하는 열매이기도 하고요.
 
이게 말이 될까요? 뭔가 보람된 일을 하고, 공부도 잘하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데서 메달 따는 걸 우리는 삶의 열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바울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갈 5:22-23)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열매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런 열매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건전한 인격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해야 할 일들이라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 운운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도 실제 삶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거나 욕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일들로 복음 전파가 지장을 받으면 안 되니까요.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자체입니다. 오늘 비유로 말하면 주인의 아들을 존대하는 것(37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제대로 믿듯이 말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
 
우선 본문을 따라갑시다. 42절에서 예수께서는 구약 시 118:22, 23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Κυρ?ο?)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요즘도 돌이 건축 재료로 중요하나 옛날에는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명 건축물은 모두 돌로 지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잉카문명의 마추픽추 토목과 건축물이 그렇습니다. 목조 건물에도 머릿돌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돌을 다루는 사람은 돌을 적재적소에 놓습니다. 쓸모없는 돌은 폐기해야지요. 본문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오히려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의 잘못을 짚으시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갇혀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습니다.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앞 구절인 마 21:23절 이하에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께서 매매하는 사람과 환전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을 내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마 21:13)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에게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위로, 즉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는지를 먼저 대답하면 자기도 대답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눈치 보느라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한 세례 요한을 믿지 않았으나 세리와 창녀는 믿었기 때문이라고(마 21:32)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었던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예수님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이라는 건축물을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주는 머릿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 성전과 바리새인들의 자랑거리인 율법을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으니까요. 당시에 예수는 말 그대로 건축자의 버린 돌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축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께서는 피고인으로 섰습니다. 신성모독자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신성모독자는 죽어야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자신들에게 사형 집행 사법권이 없어서 로마 총독에게 예수를 넘겨버렸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었던 예수가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게 실제로 말이 될까요? 이런 표현은 문학적이고 종교적인 수사에 불과한가요? 마태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한 것일까요?
 
가루로 만드는 힘
 
대답을 찾으려면 모퉁이 머릿돌이 무슨 뜻인지를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44절이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이 머릿돌은 깨고 부수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것들을 박살 내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은 바로 신적 능력입니다. 칼 라너는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 185쪽에서 “모든 것을 파멸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느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로 앞 구절인 43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 ”라고 일갈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빼앗긴다는 말은 하나님에게서 배척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비유에는 이처럼 강한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3) 하나님 나라에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지옥 표상도 이런 하나님 나라 속성에서 나온 겁니다. 삶과 역사의 신비를 맛보라고 말해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도 거리가 멉니다. 지금처럼 깊은 가을에 독보적인 빛을 발하는 ‘벌개미취’에도 마음의 감동이 없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빼앗기는 것이고, 쫓겨나는 것이고, 이를 갈며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가루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조금 더 직접적인 이야기로 바꾸면, 돈에만 정신을 파는 사람의 인생은 가루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했습니다. 유명 무형의 권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세상살이는 원래 그런 거야 하고 지나칩니다. 예수께서는 모른척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행태가 하나님 신앙을 왜곡하고 훼손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대목에 예루살렘 성전 정화사건이 벌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전이 시장판이 된 것입니다. 그런 성전 체제에 길들면 그게 왜 문제인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를 빼앗긴다는 뜻이고 가루가 된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율법 자체를 잘못이라고 하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도 제사를 바르게 드리고 기도하는 기능이 있는 것처럼 율법도 경건 생활을 유지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길들어서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전 중심주의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게 교회 현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저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잠시 경험한 독일 교회와 비교해서 한 가지만 짚겠습니다. 독일 교회는 크기가 비슷합니다. 역사가 오랜 교회와 얼마 안 된 교회가 있긴 하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극과 극입니다. 건물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하 월세를 면치 못하는 교회당이 있고, 예술문화회관 못지않게 화려한 교회당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당을 노골적으로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신약시대에 성전은 없습니다. 좋게 봐서 회당만 있을 뿐입니다. 한국교회가 성전 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성전 중심주의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행태가, 그것이 왜 문제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는 것이고 가루가 되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중이라고 주장하겠지만요. 그런 마인드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작당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가루가 되는 은총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하나 남았습니다. 모퉁이 머릿돌이 가루로 만든다는 말씀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이라는 특정한 이들을 향한 비판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행태가 똑같이 나타나거든요. 모퉁이 돌은 우리의 그런 행태를 가루로 만듭니다.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것을 가루로 만듭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절대화하던 대제사장처럼 우리가 목에 힘을 주고 붙들었던 것들, 바리새인처럼 자기 옳음에 묶였던 우리 삶의 행태가 무너집니다. 사람들에게 자랑할만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과 다른 사람들이 선하고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예컨대 노벨 문학상도 가루가 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희생 봉사도 가루가 됩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자기를 나타내려고 힘을 주지는 않겠지요.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섭섭하거나 불안하지도 않겠지요.
 
이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런 자랑거리에 치우치는 행태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요즘 장관 후보자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이런 청문회는 우리 국민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관대작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그렇게 철면피하고 위선적이라는 사실을, 온갖 뻔뻔스러움의 민낯을 확인하게 되니까요. 차라리 청문회 거치지 말고 대통령이 자기 마음대로 고르게 하고, 나중에 선거로 심판하는 게 좋은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사실은 청문 대상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몸담은 이 세상이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니까 개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든 겁니다. 제 생각에 우리를 가루로 만드는 모퉁이 머릿돌과 부딪치는 게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을 때만 우리는 삶의 실체를 직면하고,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겠지요.
 
이런 점에서 모퉁이 머릿돌이 우리를 가루로 만든다는 사실은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가루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니까 문제이지 순순히 가루가 되면 우리 삶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돈도 가루가 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안다면 마음 편히 돈을 나누면서 살아가겠지요. 친구와 가족이 많아서 즐거운 사람은, 그것도 결국에는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 가루가 되는데,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겠지요. 인생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겁먹지 말고 부딪쳐보십시오. 가루가 됨으로써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자유와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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