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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신명기 15:1~23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에게 맛있는 사탕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이 사탕은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이 사탕을 먹지 않고 잘 참는 친구에게는 나중에 사탕 열 개를 줄 거에요.” 선생님 말이 끝나자마자 냉큼 사탕을 입에 넣는 아이도 있었고, 참으려고 애쓰다가 결국에는 슬그머니 사탕을 입에 넣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끝까지 사탕을 먹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예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삶이란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오늘은 참고 견디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약속에 근거한 그 나라를 기대하며 오늘 이 땅의 부조리와 불의를 극복하는 일은 미래에 은총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가치를 오늘 이 땅에서 실현하는 일과 상통합니다. 아니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 각자의 심령 안에 실현된 죄로부터의 해방과 죽음에서 자유한 기쁨, 곧 구원의 감격을 세상으로 확대·확장하는 과정입니다. 하늘의 은총을 맛본 자의 너그러움, 그 약속을 믿는 자의 통 튼 양보, 궁극의 은총을 소망하는 자의 인내를 실천하는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매 칠 년 끝에는 빚을 면제하여 주십시오. 면제 규례는 이러합니다. 누구든지 이웃에게 돈을 꾸어 준 사람은 그 빚을 면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면제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웃이나 동족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15:1~2)
인간 자유를 유린하는 것으로 경제와 인권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7년을 주기로 빚을 면제해야 합니다. 이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개인의 양심에 기초한 자율적 도덕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응당 이 규례를 지켜야 마땅합니다. 빚을 면제해 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와 자세도 너그러워야 합니다. 거지를 구제할 때도 인격적으로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존귀한 존재로 지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를 순종하면 그 결과가 개인에게 국한하지 않고 공동체가 안정되며 민족과 국가가 부강해집니다(6).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의 어느 한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동족이 살고 있거든, 당신들은 그를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 가난한 동족에게 베풀지 않으려고 당신들의 손을 움켜 쥐지 마십시오. 반드시 당신들의 손을 그에게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십시오.”(15:7~8)
면제년에 빚을 감면하는 일과 종에게 자유를 주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구원, 곧 출애굽 사건과 잇닿아 있습니다(15). 종에게 자유를 주어 보낼 때는 빈손으로 보내서는 안됩니다. ‘넉넉하게’(14) 주어야 했습니다. 만일 면제년에 빚을 탕감하지 않거나 6년 동안 일한 종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부정하는 셈입니다. 이스라엘의 일원이기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은총 없이 살겠다는 심보입니다.
오늘의 경제 상황에서 토지로 인한 불로소득의 문제는 날로 심각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사는데도 가난의 골은 깊어 갑니다.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을 교회가 꿈꾸어야 하는데 교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맘몬에게 함락당하고 있습니다. 슬프고 딱한 일입니다.
주님, 구원의 감격을 가진 교회가 경제 정의와 관련해서 왜 이렇게 초라하고 비겁한지 모르겠습니다. 출애굽의 구원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면제년을 실행하듯 만연한 부의 불평등에 교회가 앞장서기를 꿈 꿉니다.
2024. 1.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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