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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심비우스
신명기 18:1~14
스스로 생산에 의지하지 않고 남의 호의와 배려로 삶을 지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등입니다. 그렇다고 비루하다고 자신을 탓하거나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소의 거룩한 소임을 맡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다른 지파처럼 따로 기업을 주지 않고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처럼 다른 이의 호의에 의존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2). 한마디로 한다면 세상은 자기 혼자 살지 않고 서로 보듬어 사는 공생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경쟁과 포식과 번식이 생존방식인 생물학 세계에서 그와 다른 존재 방식의 삶을 주님께서 요구하십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종교인은 왕이나 귀족과 더불어 최상류층에 속했습니다. 적어도 프랑스 대혁명에서 보듯 18세기 말까지도 1만여 명밖에 되지 않는 성직자가 프랑스 사회의 제1신분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재정을 거의 파탄내고 죽자 그 위세에 해방되어 자신들의 경제적 특권과 사회적 지위를 확장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전체 인구의 2%도 안되는 성직자와 귀족들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부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재산 증식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면세 혜택을 누렸습니다. 반면 제3신분의 평민들이 조세의 짐을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평민 중에서도 힘을 가진 부르주아들은 조세제도의 허술함을 이용하여 세금의 짐에서 벗어났습니다. 가난한 평민과 농민이 프랑스 재정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모순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과 모든 레위 지파 사람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몫이나 유산으로 받은 땅이 없으므로, 주님께 불살라 바친 제물과 주님께 바친 예물을 유산으로 받아, 먹고 살 것입니다.”(18:1)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이 있는가 하면 남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행성도 있습니다. 무엇이 더 좋다가 아니라 존재론적 가치를 따라 공생하는 삶이 하나님의 의도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승자가 독식하는 세상에서 그와 다른, 함께 하는 삶, 호모 심비우스(공생)의 가능성을 주문하십니다.
“당신들 가운데서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사람과 점쟁이와 복술가와 요술객과 무당과 주문을 외우는 사람과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사람과 박수와 혼백에게 물어 보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18:10~11)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12). 이런 사람은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합니다(12).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이 땅의 어떤 시민과 어떤 교인들은 그가 무슨 메시아라도 되는 양 경축해 마지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주님을 배신하는 일을 합니다. 동성애 문제에는 벌 떼처럼 분노하면서 그보다 더 심각한 지도자의 우상숭배에는 눈을 감는 이들이 과연 주님의 백성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경쟁과 독주와 배제가 상식인 세상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환대와 협력과 포용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낮은 자를 귀히 여기며 품부된 삶을 경축하는 은혜 주시기를 빕니다.
2024. 2. 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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