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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믿음
마가복음 1:21~34
지식과 믿음은 다릅니다. 앎과 믿음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이 나라 대통령에 대한 지식은 인터넷을 뒤져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통령과 교감하고 신뢰하여 그가 시민의 모범일 뿐만아니라 공정과 상식을 실현하고 질곡의 삶을 사는 시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좋은 지도자다운 인품과 철학과 리더십이 있는가의 문제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적이 놀랐습니다. 기존의 율법 선생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던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회당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 질렀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1:24)
귀신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학문의 대상이 되어 지성인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예수 지식에 생명력이 있으려면 단순한 앎에서 인격적 상호작용에 이르는 과정, 곧 신앙화하여야 합니다. 신앙은 신학화하여야 하고, 신학은 신앙화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 또는 구원의 확신을 지식으로 아는 일은 필요하지만 한계도 있습니다. 지식을 신앙으로 착각하면 신앙은 고착화되고 무능력해집니다. 한 번의 고백으로 천국을 획득한 듯 확신에 찬 이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빌 2:12) 스스로에 대하여서도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 3:12)고 다짐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확신하는 구원을 현실화하는 일이며, 과거의 구원을 오늘 재현하는 행위이자 미래에 완성될 구원을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일입니다. 앎과 믿음이 일치하는 삶이야말로 바른 믿음 생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가복음다움을 읽습니다. 주님께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고쳐준 사건도(31), 저녁때 소문을 듣고 몰려든 병자를 고쳐준 날도(32~34) 안식일인 듯합니다. 마가는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면서도 별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아마 유대인 공동체를 꾸리던 마태 같았다면 반드시 이 문제를 거론하여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마 12:8)를 강조하였을 것입니다. 대부분 이방인인 마가복음의 일차 독자에게는 안식일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가의 관점은 이런 일을 언제 행하였는가가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의 능력이 중요했습니다. 문제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어떤 이에게는 무덤덤할 수 있습니다. 반응이 왜 다르냐고 따지는 일은 무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주님, 사변적 신앙을 두려워합니다. 아물러 맹목적 광기의 신앙도 무섭습니다. 이 시대의 신앙이 지성과 삶을 겸비하여 온전함을 지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2024. 2. 1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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