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마가복음 2:13~28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다. 무리가 모두 예수께로 나아오니, 그가 그들을 가르치셨다.”(2:13)
마가는 예수님의 주변에 몰리는 사람들의 규모를 적시하고 있습니다.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1:5),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1:39), ‘사방에서 몰려온 사람들’(1:45), ‘많은 사람들’(2), 중풍 병자가 근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4). ‘큰 무리’(13, 3:9)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시대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점에 대한 마가식의 표현입니다. 당시 팍스 로마나를 이룬 황제들이 이들에게 희망을 주지 않았고 번드르르한 예루살렘 제사장 전통 종교가 그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님만이 그들의 절망을 어루만져 주셨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였습니다.
오늘도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절망감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많고, 세계가 미국과 중국 양대 축을 중심으로 한 블록화가 가져온 현실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전보다 윤택해진 듯한데 마음은 더 각박합니다. 곳곳에서 들리는 전쟁 소식으로 마음이 불안합니다.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싶어 안달하는 이들이 이 나라의 정권을 잡았고, 북한도 남한을 ‘제1의 적대국가, 불변의 주적’이라며 적의를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이라면 한반도에서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이상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절망의 현실에서 한 줄기 희망을 기대하며 환대와 치유의 예수님을 만나려고 교회를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교회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잃어버린 교회는 그 자체로서 사람들의 절망을 더 깊게 하는 반예수주의의 선동자입니다. 치유와 평화와 희망을 주는 종교가 아니라 절망의 심연이 얼마나 깊은지를 확인시켜 줄 뿐입니다. 마가는 그런 현상을 한 마디로 ‘목자 없는 양 같다’(막 6:34)고 슬퍼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2:23~24)
마가는 마가복음 1장에서 간과하였던 안식일 논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속한 공동체가 주로 이방인 중심이었기에 안식일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더라도 안식일이 주일로 변화하는 과정에 안식일 신학(또는 주일신학)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은 의식의 노예가 된 안식일 종교에 자유를 선포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담은 날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자신의 몸을 통하여 이루실 십자가 구속과 부활을 더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2:27~28)
주님,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희망을 갈구합니다. 힘 있는 이들의 놀음에 삶의 터를 잃고 난민이 되거나 부자들의 소득 증대를 위하여 노예처럼 사는 이들이 오늘도 주님의 환대와 위로를 기다립니다.
2024. 2. 13 (화)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