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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되는 가족
마가복음 3:20~35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자아를 ‘I’와 ‘Me’로 구분하였습니다. ‘I’는 주격 대명사이고 ‘Me’는 객관적 대명사인데 중요한 점은 ‘Me’에 목적격 기능도 담겨있다는 점입니다. ‘I’는 자기의 이기적 욕망에 충실한 존재이고, ‘Me’는 사회적 가치, 즉 사회적 정의와 가치와 규범 등이 축적된 존재라는 것이 윌리엄 제임스의 논리이지 싶습니다. 인생에서 ‘I’와 ‘Me’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점차 자신을 객관화할 때 자신도 행복하고 공동체도 평화로울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인류 사회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적어도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탐욕입니다. 탐욕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악한 생각입니다. 이런 악이 있는 한 세상은 평화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여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결국 힘의 숭배를 정당화하기에 이릅니다. 의인이 악마가 되는 과정도 그 본질에서 변절해서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기의 로베스피에르나 당통, 마라처럼 힘을 욕망의 도구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대화와 타협은 무력한 자의 비겁함으로 비치고, 약한 이들은 굴욕을 강요받기 마련입니다. 두 번째는 위선입니다. 위선은 말 그대로 거짓된 선입니다. 사탄도 얼마든지 의의 천사로 위장할 수 있습니다. 위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악덕이기도 합니다. 위선자에게는 회개 자체도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위선은 특히 주변으로부터 선하다고 인정받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셋째는 이기주의입니다. 사람은 본질에 있어서 죄인이므로 견리망의(見利忘義),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느라 의를 잊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이기주의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새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이기주의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끼?”(창 4:6)하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는 길에서 강도 만난 자를 기꺼이 돌보는 사마리아인(눅 10:30~36) 그 이상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기주의자에게는 공감 능력이 없습니다. 혹 있더라도 악어의 눈물에 불과합니다. 공감이야말로 성령의 능력이고 복음 전도의 동기이자 신앙의 원천입니다. 뿌리가 너무 깊어서 인류 역사에서 근절되지 않는 탐욕과 위선과 이기심을 조심해야겠습니다.
주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주님의 인기가 치솟자 주님을 시샘하는 기득권 종교인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이를 듣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주님께 알렸습니다. 이에 주님은 자문자답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3:33)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3:35)
주님은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3:34)
가정은 이해와 관용과 환대의 공동체입니다. 가족 간에는 경쟁과 싸움보다 사랑이 우선합니다. 교회는 확장된 가정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그런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란 확장되는 가족의 세계입니다.
주님, 가족 안에서는 탐욕도, 위선도, 이기심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본래 인류의 시작은 그랬습니다. 타락이란 그 자리를 이탈한 것이고, 죄란 그 원리를 깨트린 것입니다. 가족애가 회복되기를 빕니다.
2024. 2. 1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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