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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
마가복음 4:26~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4:34)
주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유효하였던 이유는 생활 공동체였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숨소리까지 들으며 배웠습니다. 거기에 주님의 가르침의 방식이 남다른 비유였다는 점, 그리고 제자들에게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특별수업이 있어서 교육효과가 극대화되었을 것입니다. 3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주님의 교육은 제자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는 베이비붐 세대입니다. 신학교에 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학생이 더 많아졌고 교단의 명분 없는 분열로 우후죽순처럼 무인가신학교가 많아졌습니다. 신학교가 꼭 인가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신학교마다 학생이 차고 넘쳤습니다. 세계에 유래 없는 신학교 장사가 성황이었습니다. 내가 속한 학과 정원이 50명이었는데 이웃 학과와 합반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100여 명의 학생이 콩나물시루 같은 좁은 강의실에 빼곡히 앉아 강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교수님과 눈빛 한번 마주치지 못한 채 강의는 흘렀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강의는 주입식의 중고등학교 교육의 연장이었습니다. 아무튼 교수님들은 열심히 강의하였고 학생들은 그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가끔 질문이 있기는 하였어도 질문이 학문의 깊은 세계에까지 다다르지는 못했습니다. 훌륭한 교수님이 많이 계셨지만 교수님의 학문 세계에 근접하고 훌륭한 인품을 체득하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여건도 맞지 않았습니다. 사제의 연을 쌓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학생들은 썰물처럼 왔다가 밀물처럼 나갔습니다. 1980년 이후 한국교회 성장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고 30~4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교회의 폐단도 거기에 있지 않았나 생각하니 속상합니다. 지금은 신학교 수업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근래에 신학생이 줄어 제자와 스승의 간격이 좁아져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어 쓴 웃음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4:33)
주님은 제자들의 지적 수준을 아시고 낮은 자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높은 수준의 스승이라고 젠체하거나 난체하지 않고 낮은 자리로 내려와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좋은 교육은 제자와 스승의 교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호흡과 호흡이 교차 될 정도로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교육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은 더욱 그렇습니다. 스승을 먼발치에서 보고서도 훌륭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사랑의 학문을 하면서 인격적 교감 없이 수업이 이루어지는 일은 신학에 대한 모독입니다.
주님, 신학 교육이 스승과 제자의 인격적 교감 위에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목회 현장에서도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 정도의 친밀함을 갖게 하여 주십시오. 규모와 외모로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2024. 2. 18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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