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거룩한 포기
마가복음 6:30~44
파송하였던 열두 제자가 돌아와 주님께 사역 보고를 하였습니다. 마가는 이들을 ‘사도’라고 지칭합니다(7, 3:14). 사도라는 호칭은 초대 교회에서 권위 그 자체였습니다. 제자들은 자세하게 보고하였고, 주님은 그들의 보고를 경청하고는 따로 쉬기 위하여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갔습니다. 마가는 그곳을 벳새다 건너편((45)이라고 했고 누가는 벳새다라고 명기합니다(눅9:10).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주님보다 먼저 육로를 달려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바른 가르침에 허기져 있었습니다. 주님은 기꺼이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6:34)
주님은 자신을 따라온 큰 무리를 목자 없는 양으로 인식하십니다. 유대 사회에서 ‘목자’란 우선 헤롯 왕과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을 말합니다. 하지만 헤롯은 로마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갈릴리 서안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하는 도시 디베랴를 세우는 등 권력 지향의 사람이었습니다. 친로마적인 왕은 유대인의 목자일 수 없습니다(친일 지도자는 한민족의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시 종교는 부패하고 권력화되어 백성에게 목자 구실을 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양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 목자입니다. 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하지만 당시 목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고 일신의 안위와 영예에만 관심을 가질 뿐 도탄에 빠져 절망하는 백성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말씀을 가르치셨고, 또 때가 저물어 시장기를 느낄 무렵에는 보리떡과 물고기로 모인 무리를 배 불리 먹이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빵이 필요합니다. 굶주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누가 되었든 천부적 존엄성이 지켜져야 합니다. 그래서 노동합니다. 전에는 가난의 이유가 게으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도 가난한 경우도 많습니다. 세상이 악하고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시대와 오늘이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한 어린아이가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요 6:1~15)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한 어린아이의 거룩한 포기와 자발적 헌신이 있었기에 기적이 가능하였습니다. 기적을 원한다면 어린아이 같은 포기와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헌신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도 잠잠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마 4:4). 사람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끄럽게도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나라 중에 35위입니다(2023). 삶의 만족도는 얼마나 모았느냐에 있지 않고 거룩한 낭비의 규모에 비례합니다. 많이 포기하면 많이 행복하고,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으면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겸손과 순종과 헌신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주님, ‘목자 없는 양’은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 이 땅에도 차고 넘칩니다. 정치 지도자는 함량 미달이고 종교는 세속화되어 하늘의 가치와 질서로 이끌지를 못합니다. 이 땅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2024. 2. 25(주일)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