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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예배
마가복음 7:1~13
정작 중요한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때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말합니다. 종교가 체계를 갖추고 확장하면서 종교 본연의 가르침이나 원리보다 제도와 의식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경우에 이런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는 장로들의 전통과 규례가 많았습니다. 위생과 제의라는 관점에서 필요하였고, 사회 인류학적이고 도덕적 관점에서도 유익하였습니다. 문제는 정신보다 형식을 중요히 여길 때 규례에 담긴 생명력은 잃고 만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유대 전역에 퍼지자 종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에서도 이 나사렛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긍정의 눈으로 보기보다는 까칠하게 보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학자 몇 사람을 보내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태를 살피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었습니다. 이를 본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따지듯 물었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7:5)
율법에 정통한 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와 그 일행은 반율법적이며 경건치 않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지도자인 예수님에게 있다고 보아 질책하였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그런 류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어서도 그겠지만 율법과 전통의 한계를 깨고자 성육신하신 주님으로서는 그런 형이하학을 가르치셨을 리 없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겉은 깨끗하면서도 속은 더러웠습니다. 전통과 관습을 소중히 여기면서 진리는 거부하였습니다. 부모는 버리면서도 하나님은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생명력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위선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합니다. 남의 눈의 티는 잘 골라내면서도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않습니다. 그릇은 그릇 자체로서 가치보다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로 규정되기 마련입니다. 예루살렘 종교는 그릇 자랑에만 몰두하였습니다.
부정과 정결을 대하는 모세의 관점과 주님의 관점이 충돌합니다. 모세에 의하면 정한 사람이 부정한 사물을 만지면 부정해집니다(레 11~15장). 그래서 주검을 만지거나 병자를 접촉하면 안 됩니다.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식이 주님에게서 무효화 되었습니다. 주님은 거라사의 무덤 사이에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만나 주셨고(5:6), 혈루증 여인의 접촉을 허락하셨으며(5:30) 야이로의 죽은 딸의 손을 잡으셨고(5:41), 병자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하였습니다(6:5). 주님에 의하면 정한 자가 부정한 자를 만지면 부정한 자가 정해지는 원리,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큰일나지 않습니다. 정작 큰일은 위선적인 태도입니다.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7:7~8)
주님, 저 역시 위선의 늪에 허우적거립니다. 용서와 긍휼을 구합니다. 복음 진리에 바로 서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2024. 2.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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