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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높은 산에
마가복음 9:2~13
불가 스님들의 동안거와 하안거가 부럽습니다. 가장 추울 때와 더운 계절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집중적으로 수도 생활에 정진하는 점을 배우고 싶습니다. 종교개혁 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도원 전통을 살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개신교에는 파라처치나 개인적으로 하는 수도원만 있을 뿐 공교회가 중심이 된 수도원은 없습니다. 구도의 길을 걷고자 헌신하여 신학교를 졸업하면 목회자의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묵상과 노동과 학문과 예술과 섬김의 수도사적 삶이 없다 보니 경쟁하듯 목회 현장에 나가야 합니다. 신학교를 나왔다고 누구나 다 설교를 잘하는 것이 아닌데 누구나 설교해야 합니다. 묵상을 즐거워하고 학문 추구를 낙으로 삼는 이도 있을텐데 자신의 취향을 살려 주님의 교회를 섬기기가 어렵습니다. 주어진 재능과 기능과 노동을 통해 교회를 섬기는 길이 차단되므로 그런 이들의 헌신은 현재 개신교의 공적 질서 안에서는 원천 봉쇄되고 맙니다. 모두 획일화된 목회 현장에 내몰립니다. 수도원 제도가 유지되었다면 다양한 기독교 인재를 교회가 품고 발전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 개혁자들은 중세교회의 타락에 수도회의 역할이 컸다는 시각이 있었고, 높은 울타리로 가려진 특정한 장소만 거룩한 곳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 거룩해야 한다는 신학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가셨습니다(2).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했습니다. 제자들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어서 겁에 질려 횡설수설했습니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9:5)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놀라운 말씀과 기이한 능력의 나타남을 보았습니다. 병자가 낫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는가 하면 떡 몇 개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는 일을 보았습니다. 흉용하는 바다가 말씀 한마디에 잔잔해지는 일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구름이 덮히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7)
마가는 마가복음을 열면서 이미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1:1)로 소개합니다. 당시 로마 세계에는 오직 황제만 신의 아들로 불리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마가의 호칭은 로마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역 행위로 보였을 것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마가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8:29)로 강조하는 것은 로마를 초월하는 세계의 존재를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따로 높은 산’에 올라 신비를 체험한 제자들도 이런 확신이 생겼습니다(벧후 1:17). 신비가 사라진 신앙, 논리와 상식만 존재하는 교회는 세상 질서를 초월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로 높은 산’에 올라야 할 이유입니다.
주님, 세속 질서를 초월하는 능력은 말씀과 신비에 터합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힘이 없으면 교회는 조롱을 받습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세속의 가치를 초월하는 능력을 이 시대 교회 위에 주십시오.
2024. 3.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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