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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무능력
마가복음 9:14~29
전에는 주변에서 그 능력을 알아보고 어떤 직임을 맡기면 예의상이라도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는 일이 미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감이 있고 의지가 있어서 겸양이 도리어 교만으로 보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능력도 없고 안목도 없고 자질도 모자라는 이가 적임자임을 자처하며 거들먹거린다는 점입니다. 특히 정치계를 보면 더 그렇습니다. 정치란 시민의 삶을 발전시키고 미래 공동체를 희망 있게 하는 고도의 기술이자 인류 역사와 인문지식과 철학과 리더십의 결정체입니다. 공동체적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줄이고 창조적 대안을 제시하며 특히 사회적 약자가 모멸감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살므로 구성원 모두가 희망을 품게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커녕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안목도 없는 철부지이면서도 자신이 슈퍼맨이라도 된 듯 착각하는 이들이 정치판을 어지럽히며 저질 코미디로 만들고 있습니다.
주님과 세 명의 제자가 따로 높은 산에서 내려올 무렵, 산 아래에서는 남아있던 주님의 제자들과 율법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많은 구경꾼이 모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와서 아들을 고쳐 달라고 하였는데 제자들이 고치지를 못해 일이 커졌습니다. 그런데 이 논쟁의 주제는 오늘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앓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류 공동체의 문제가 여기에 다 있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은 자기가 자신을 보아도 한심합니다. 자주 거품을 물고 쓰러집니다. 엎드러져 구르기를 반복합니다. 의지적으로 그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자기 뜻대로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아들이 되고 싶으나 현실은 근심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야무진 꿈을 꾸기도 하였지만 이내 뜬구름 잡기임을 깨닫습니다. 무엇하나 제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자기 삶에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지배를 받는 세대의 모습입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비의 무능력에서 오늘 기성세대의 무력함을 봅니다. 자식이 겪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감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뛰어드는 아들을 바라볼 뿐입니다. 예수님에게한 가닥 희망을 걸고 찾아왔으나 주님은 부재이고 제자들은 무력했습니다. 문제는 알고 있으나 모르는 것만 못합니다. 제자들은 마땅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위치에 있었으나 그들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전에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다니며 놀라운 능력을 보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능력을 상실한 오늘의 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소년의 희망적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제자들의 무책임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율법학자들, 그리고 좋은 구경이 생긴 듯 몰려든 많은 사람이 오늘 우리 시대의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딱하고 슬픈 세상입니다.
주님, 절망하는 청년세대를 도와줄 수 없는 기성세대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능력을 상실하고 무책임해진 교회가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이 현실을 은근히 즐기는 뻔뻔한 역사의 방임자들이 밉상입니다.
2024. 3.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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