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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제자도
마가복음 9:38~50
우리의 근대사는 편협함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학연과 지연, 그리고 좁은 이념의 테두리 안에서 제각기 살길을 도모하다 보니 너그러움도 없고 여유도 없이 살았습니다. 편 가르기가 익숙해져서 매사를 내 편과 네 편으로만 보았습니다. 내 편에 대하여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네 편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냉혹했습니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겨 망국노 처지가 되었을 때 백성은 민족 독립의 기치 아래 모였습니다(물론 일제에 부역하며 일신의 행복과 일가의 번영을 추구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가장 큰 화두는 무도한 폭력으로 우리 땅을 강점하고 있는 일본을 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민족 독립이라는 대의에 참여하는 이들은 다양한 계층의 백성이었습니다. 양반 출신도 있고 노비 출신도 있었습니다. 유학자도 있고, 그리스도인도 있고, 동학교도도 있었고, 민족주의자도 있고 사회주의자도 있고 아나키스트도 있었습니다. 저마다 색은 달랐으나 대의를 위해 협력하였습니다. 그 과정에 불협화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는 ‘조국 건설’이라는 대의 앞에서 대오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권력을 숭배하는, 상대적으로 약한 정치세력이 일제 부역자들과 연합하여 ‘반공’을 빌미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이렇게 많은 시민이 학살된 예는 없습니다. 당시 정부는 무고한 시민의 죽음을 막고 사태를 통제하여야 마땅하지만 도리어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공포한 비상조치령 같은 전시법령이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었으니 학살의 최종적인 책임자는 당시 대통령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그런 지도자를 국부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인지 당사자들은 모릅니다. 인간의 기본권에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못하면 자신의 생각도 배척받기 마련입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9:38)
주님은 요한의 질문에 대하여 제자 공동체에 속해있지는 않더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이들을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자신들만이 예수님의 유일한 제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울타리를 치고 특권을 독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다른 신학’과 ‘다른 질서’를 함부로 ‘나쁜 신학’, ‘틀린 질서’로 단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40)라며 제자들의 독선을 나무라셨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에게 단호함을 요구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9:42~43)
주님, 저희는 너무 편협하고 옹졸합니다. 경우에 맞는 포용력이 필요하고, 제자도의 엄격함은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여야겠습니다.
2024. 3. 7(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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