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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마가복음 10:1~12
바리새파 사람들이 불손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2)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도전적이고 불손했습니다. 애초에 이혼 문제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모세의 가르침은 어떠하냐’고 물었고 그들은 ‘이혼증서를 써주면 버릴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4). 신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제도가 있다고 무엇이든 가능한 게 아닙니다. 이혼은 악한 남자들에 의하여 약한 여성들과 가족들이 피해당하지 않도록 만든 불가피한 제도이지 이혼이 허용되었으니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이 사람의 삶 속에 구현하는 신비입니다. 주님은 모세의 율법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0:9)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은 대개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입니다. 신학도 그렇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대개 그렇습니다. 나도 그동안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1학년 때는 김성환 목사의 <칼빈주의 해설>을 감명 깊게 읽었고, 김의환 교수의 《도전받는 보수신학》을 읽으며 은혜(?)를 받았고, 박형룡 박사의 <교의학 전집>을 대하며 무릎을 쳤습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의 주제로 변선환 박사와 박아론 박사가 치열하게 지상 논쟁을 할 때도 나는 의당 보수주의 신학자 박아론의 편을 들었습니다. 칼 바르트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신학 풍토였으니 그 신학의 폭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지금도 내 신학의 기조가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의 언어로 배운 신학이 전부이니 그 외의 신학이 낯설고 버겁습니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보수신학에 대한 질문이 늘었고, 보수주의 밖의 신학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왜 보수주의 신학은 이 정도 생각에 머물러 있을까? 왜 저들은 저런 신학이 가능할까? 우리는 왜 원리를 강조하고 저들은 왜 현실이 중요하다고 할까? 현실화하지 않는 신학은 죽은 게 아닐까? 내가 붙잡았던 것이 썩은 동아줄은 아닐까?
물론 나는 얕으나마 나의 신학을 스스로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나의 학문과 사유가 건강한 신학에 이르고 바른 교회를 세우며 따뜻한 사회에 이바지하여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신학으로 진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무리 수사력이 뛰어나고 화려하더라도 힘없는 자를 배제하고, 가난한 자를 소외시키며 기득권을 가진 자의 편에서 그를 옹호하고 권력에 기대는 신학은 가짜입니다. 초대 교회 사도와 교부의 전통을 이어받고 종교개혁 시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역사에 이바지하지 않는 신학은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성경은 변함이 없어도 신학은 성경을 현실화하는 책무가 있는 만큼 시대마다 주어진 난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를 방기하는 신학은 그 자체로 존재 이유를 상실한 싸구려 학문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벌어진 극단의 증오와 대결을 막기는커녕 그런 일을 조장하는 신학이 교회의 학문이라면 부끄러워하여야 합니다. 무자비한 독재와 정적 살해와 생명 살상의 장본인을 국부 운운하는 신학은 무지이고 독선입니다.
주님, 신학은 명료해야 하고 성경의 의도를 현실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학은 저마다 옳다고만 하고 오늘과 상관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을 성찰하고 그 객관성의 길을 따르겠습니다.
2024. 3. 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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