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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의 외침
마가복음 10:46~52
고양이는 쥐를 생각해 주지 않습니다. 사회적 약자가 자신에게 품부된 기본권을 주장하면 사회 기득권에 해당하는 이들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장애인단체가 이동권 개선을 주장하며 지하철에서 침묵시위를 하면 당국은 법과 과태료 등으로 겁박합니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그동안 무심했던 정책을 반성하며 모두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보완하여야 마땅합니다. 이를 공감하는 민주 시민은 시위에 나선 이의 주장에 연대하며 약간의 불편을 겪더라도 공생의 대가라고 생각하여 참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장애인의 시위로 발생하는 불편에 분노하며 불쾌감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역사에서 자유란 언제나 기득권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자유는 시민의 자유였습니다. 영혼 없는 노예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흑인과 농노는 자유를 누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색인종을 마음껏 차별하였고 무시하였고 학대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자유가 논의된 시점은 역사에서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17세기의 영국과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은 노예무역으로 국부를 이루었습니다. 교회조차도 이런 악행에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다만 퀘이커가 이를 주시하여 시민 대중에게 그 부당함을 호소하였고 1772년에 영국 의회에서 D. 하틀리(1732~1813)가 처음 이 문제를 제의하였으나 부결되었습니다. 그 후 깨어있는 지성인 T. 클라크슨(1760~1846)과 W. 윌버포스(1759~1833) 등의 노력으로 노예무역 폐지법이 제정되었고(1807), 노예제가 폐지되었습니다(1834).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0:47)
소경 바디매오가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48). 앞을 보지 못하는 자는 평생 그렇게 살라는 저주이자 사회적 약자는 은총에서도 제외된다는 악담으로 들립니다. 바디매오를 제지하는 군중은 지금 이 사회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자기는 작은 불편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사회적 약자가 겪는 불편은 당연시합니다. 며칠 전 감리회 총회 재판위원회가 성소수자를 축복했다는 이유로 이동환 목사를 출교시켰습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과 동성애자를 축복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교회는 기지촌에도 있고 교도소 안에도 있습니다. 목사는 사형수에게도 축복할 수 있는 권위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교회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버렸습니다.
소리쳐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켜져야 합니다. 그리고 언론이 이를 증폭시키고 건강한 시민이 연대하여야 합니다. 권력을 틀어쥔 이들은 알아서 사회적 약자들의 불편을 해결해 주지 않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만나 주십니다(51). 하나님은 늘 약자의 편이십니다.
주님, 종말은 교회에서 시작하는 듯하여 송구합니다. 낮은 자리에 슬피 우는 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 되기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종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은총을 더하여 주십시오.
2024. 3.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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