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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과 예수
마가복음 11:12~26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보신 모습은 본래 성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은 돈을 바꾸는 사람들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1:17)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에서 본래 성전에 대한 주님의 인식과 당시 존재하던 성전에 대한 주님의 이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성전 신학과 교회 신학을 세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성전을 ‘내 집’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말씀(사 56:7)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당시 종교 기득권층으로부터 불경죄요 신성모독죄로 고발 고소당할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감히 성전을 ‘내 집’이라고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더 나아가 성전을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본래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자신의 죄를 동물에게 전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 은총을 확인하며 소망의 삶을 출발하는 장소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임당하셨습니다. 성전은 죄의 용서가 선포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갈릴리와 유대를 다니며 사죄를 선포하셨고 죄로부터 해방을 상징하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사역에 가장 긴장한 이들이 바로 성전에서 종교 기득권을 누리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당시 종교계를 비판하셨습니다. ‘강도들의 소굴’이란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상행위를 이르는 말씀입니다. 정당한 상행위는 성전이라 할지라도 용납할 수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먼 길을 오느라 제물 대신 돈을 가지고 와 편의를 위해 마련한 매대에서 비둘기나 양과 소 등 제물을 사서 바쳤습니다. 성전세도 로마 화폐가 아니라 성전 화폐로 환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정당한 상행위, 원가에 약간의 이문을 얻거나 미미한 수수료를 붙이는 행위는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폭리를 취하여 상대의 주머니를 터는 행위는 강도짓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이 보신 당시 성전은 그랬습니다.
주님의 이런 행동을 보고 가장 놀란 이들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장소로 특화된 성전을 통하여 명예를 유지하고 삶을 보전하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성전 청결사건을 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BC 215~BC 164)가 대제사장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상을 세우고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는 성전 모독 사건 후 가장 큰 사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에게 적대감을 느낀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18) 골몰하였습니다. 자기 이해에 얽혀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들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보셨던 깨끗하지 않은 성전은 지금 깨끗하지 않은 교회로 여전합니다.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온 자로서 부끄럽고 송구합니다. 교회의 거룩함과 순수함이 지키는 이들에게 힘 주시기를 빕니다.
2024. 3. 14(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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