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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마가복음 11:27~12:12
이솝이 전하는 이야기에 물살이 빠른 계곡의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두 마리 염소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먼저 다리에 발을 디딘 염소와 더 많이 건너온 염소 중에 누가 양보해야 할까요? 자기의 주장을 굽혀 남의 의견을 좇는 일,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일을 ‘양보’라고 합니다. 누구나 양보하는 일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기가 양보할 경우가 생기면 기분 상해합니다. ‘양보는 패배자의 변명’이라거나 ‘한번 양보하면 또 양보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솝 이야기에서 두 염소는 서로 양보하지 않다가 모두 계곡으로 떨어졌습니다. 살다 보면 자존심만 앞세우다가 낭패를 보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의견이 다른 두 당사자 서로 좋도록 조정하여 협의하는 일을 ‘타협’이라고 합니다. 대화와 설득을 통하여 더 좋은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일은 사람만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염소들이 “이번에는 내가 양보할 테니까 좋은 풀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니?” 하거나 “그래. 다음에는 내가 양보할게” 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알면서도 틀린 답을 쓰는 게 인생입니다. 짧고 굵게 사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때로는 가늘고 길게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멀리, 그리고 길게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세상일에는 타협할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이와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굳이 하시디즘 사상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생명을 담보로 안전을 보장하는 얄팍한 꾐은 거부하여야 합니다(『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137). 진리와 생명을 부정하는 이들과의 타협은 배교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있은 다음 날 예수님과 유대 종교 기득권자인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다시 만났습니다. 어떤 타협점을 만들려는 시도는 아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까?”(11:28)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11:30) 되물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질문에 담긴 ‘요한의 세례’의 의미가 세례자 요한에 대한 백성의 존경 여부가 아니라 주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받는 장면에 담긴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주님의 세례받는 장면을 묘사한 마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있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아들이 등극을 뜻하는 시편 2:7과 이스라엘의 구속자 메시아의 오심을 전하는 이사야서 43:1의 인용구입니다. 권위의 근거를 묻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그 권위로 성전을 청결케 하였고, 백성을 가르쳤으며,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답하신 셈입니다. 결국 주님과 종교 지도자와의 타협은 불발되었습니다.
주님, 짧은 안목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천박해지기 십상입니다. 멀리 길게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양보할 것과 타협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양보하면서도 비굴하지 않는 길을 찾습니다.
2024. 3. 15(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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