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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하는 지성인
마가복음 12:28~34
주님과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유심히 듣는 한 율법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범주 안에 있었으나 그 질서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오랜 제도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 한계를 감지하여 본질을 찾고자 노력하는 소장파 학자이거나 권력화된 종교의 한계에 식상하여 제3의 길을 추구하는 개혁자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어쩌면 요즘 한국교회에 만연한 가나안 신자, 즉 권력화되고 화석화된 교리를 맹신하며 세속화와 광신의 길을 용감하게 걷는 교회에 반기를 들었지만 그렇다고 진리와 생명의 주님을 부정할 수 없는 지성적 그리스도인 같은 부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나안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세속화된 교회는 부정하지만 보이지 않는 우주적이고 역사적 교회에 대한 신망은 변함없습니다.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가나안 운동(?)이야말로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율법학자는 귀가 솔깃해졌고 진리에 접촉한 뜨거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동안 기성 종교에서 맛볼 수 없던 상쾌한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는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난 지자(智者)입니다. 주님을 대적하던 종교 지도자들이 물러난 후 그 율법학자가 주님께 조심스럽게 근접하여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12:28)
아마 주님은 이 율법학자의 등장과 지성에 기초한 질문을 기다리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능력의 주님이 등장함으로 위기를 느껴 척진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에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함정을 파놓고 집요하게 공격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저주와 성전 청결 사건, 그리고 포도원 비유를 통하여 껍데기를 붙잡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과 첨예하게 각을 세웠던 주님은 이 율법학자와 긍정의 대화를 나누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12:29~31)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선순위의 문제를 염두에 둘 수는 있으나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성립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행복하기를 누구보다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처음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죄와 죽음의 자리에서 비참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은 견디지 못해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근심이었습니다.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을 마련하기 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언약이 있었고 그에 근거하여 주님은 성육신하셨습니다. 근래에 성소수자를 축복한 젊은 목사를 출교하는 교회가 있어 씁쓸합니다. 목사가 축복 기도할 때 신분증 검사를 하고 사상을 검증해야 하나요? 그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할 일일까요? 그를 출교시킨 교단의 교리에 의하면 죄인과 약자를 저주하여야 옳은 일이었을까요? 지성과 상식을 잃은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주님, 율법학자의 맑은 지성이 오늘 저희에게도 요구됩니다. 맹신과 광신을 무기로 동굴의 무지를 요구하는 권력화된 교회 그 너머의 진리를 보는 지성의 맑은 눈을 저희에게도 주십시오.
2024. 3. 1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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