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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마가복음 12:35~44
나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배웠습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다고 공부했습니다. 물론 나는 그렇게 배운 바를 믿음으로 수용하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이 나를 포함하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고백의 자료인 원전 성경은 한 권도 존재하지 않으니 성경에 대한 이와 같은 신학은 논쟁거리가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전에 읽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 점을 계시의 발전성, 또는 발전적 계시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창세기의 구원론과 말라기의 구원론, 마태복음의 구원론과 요한계시록의 구원론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보다 요한계시록이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더 정확해지고 완성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옛 시대를 살았던 신앙인보다 새 시대를 사는 신앙인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조금 더 근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경우에도 시간과 함께 그 신비함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대부분 유대인은 유일신 하나님을 긍정하고 믿었으나 그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화된 하나님 인식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유대교에서는 삼위일체론적 신인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깨달은 바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창세기 1장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존재하지만 시편과 잠언에서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 인격의 다중성을 묘사합니다.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12:36)
이 말씀은 시편 110:1의 말씀입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고백이라고 규정하십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는 일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옳은 말씀입니다. 다윗이 성령님을 통하여 깨달은 바는 당시 대제사장도 인식하지 못하는 이해입니다. 이후 잠언에서도 지혜가 인격화되는 묘사가 반복되었습니다(잠 1:28, 2장, 8~9장 등). 후대에 묵상과 성찰이 깊은 랍비들이 비로소 ‘하늘에는 전능자가 두 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는 이들의 신학을 이단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막연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인식에 이르는 장면이 계시의 발전성, 또는 계시는 언제나 동일하지만 그 계시를 이해하는 사람의 지성이 발전한다는 점에서 놀랍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 왕조의 끝에 주님이 계십니다. 다윗의 후손 예수는 다윗이 이루지 못한 그 나라를 완성시키십니다.
주님, 다윗보다 먼저 계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신비를 경탄합니다. 저희의 지성이 진리에 접촉하고 시대적 한계를 넘어 영원에 잇닿기를 빕니다.
2024. 3. 1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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