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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도망하여라”
마가복음 13:14~27
예루살렘 성전 붕괴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1~4)에 주님의 답변이 이어집니다. 5~23절에서 ‘조심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이 수미쌍관을 이룹니다. 수미쌍관이란 시가에서 첫 연과 마지막 연에 같은 내용을 반복하므로 시의 운율감과 안정감, 그리고 강조하려는 바를 드러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조심’을 강조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종말에 대한 이해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그때에는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13:14)
유대인들은 역사에서 이미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주전 167년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BC 215~BC 164)가 이집트 원정을 중단하고 돌아가던 중에 예루살렘에 들러 성전에서 돼지를 잡아 제사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유대인을 학살하고 안식일을 폐하고 할례를 금한 바 있습니다. 이 일로 유대인들은 ‘경건한 백성’이라는 뜻의 하시딤 운동을 전개하여 에피파네스 4세의 헬라화에 맞섰습니다. 그들은 세속을 멀리하고 율법을 중시하며 메시아 대망 사상을 품었습니다. ‘구별된 백성’이라는 뜻을 가진 바리새파가 이에 속하며, 세속과 격리되어 경건을 실천하고 금욕과 공동생활을 유지한 ‘조용한 사람들’ 엣세네파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 “산으로 도망하여라”(14)를 ‘숨어서 싸우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역사에서 교회는 다양한 종말 상황을 만났습니다. 초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14세기 영국에서는 존 위클리프(?~1384)의 가르침을 따라 청빈을 실천하며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전도하는 청빈한 사제, 롤라드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교회로부터 이단을 몰려 핍박받았습니다. 보헤미아의 개혁자 얀 후스(1371~1415)를 따르는 타보르파와 우트라크파가 있었는데 우트라크파는 1467년에 보헤미아 쿤발트에 모여 보헤미아형제단을 결성하였습니다. 그후 2세기를 견뎌낸 보헤미아형제단은 30년전쟁(1618~1648)을 피해 떠돌던 중 1722년 진젠도르프(1700~1760) 백작으로부터 ‘주님의 보호처’를 뜻하는 영내 헤른후트에 거주하면서 모라비안형제단이 출범하였습니다. 그들은 권력화된 정치와 종교를 배제하고 오직 경건과 섬김의 자세로 600년을 이어오고 있지만 역시 종교 권력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위그노전쟁(1562~1598) 때 광야교회도 같은 맥락입니다. 앙리 4세의 낭트칙령(1598)으로 자유를 잠시 맛보는 듯하였으나 루이 14세의 등장으로 위그노들은 프랑스대혁명(1789) 때까지 길고 고단한 광야 시대를 견뎌야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현현을 드러내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권력 욕망의 집합체였습니다. 이때 거룩한 백성은 핍박을 받았고 그리스도인은 산으로 도망했습니다. 복음 가치를 유지하는 생존만큼 훌륭한 싸움은 없습니다.
주님,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권력화된 교회는 오늘 세속화된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순수성 유지를 위해 산으로 도망했던 그 마음으로 세상을 관조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하기를 갈망합니다.
2024. 3. 20(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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