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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
마가복음 14:22~31
누구에게나 처음과 마지막이 있습니다. 처음도 귀하지만 마지막은 더 의미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만찬은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역사가 전개되는 날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언행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거기에 담긴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의 장소를 지목하셨고 그곳에서 제자들과 의미있는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이 식탁은 단순히 육체의 허기를 면하기 위한 식탁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만찬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주님과 하나 됨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됨을 확인합니다.
이 떡을 나눔은 우리의 사랑을 나눔이니
그대들과 나는 이제 한 웃음 가진 벗이라
이 잔을 나눔은 우리의 사랑을 나눔이니
그대들과 나는 이제 한 울음 가진 벗이라
그대들과 나 한 하늘에서 났듯이
그대들과 나의 가슴에 한 피가 흐르고
그대들과 나 한 하늘을 살 듯이
그대들과 나의 갈 곳도 오직 한 곳이라
백창우 선생이 시를 짓고 곡을 붙인 성찬 노래 <나누기>입니다. 우리 공동체에서는 매 주일 애찬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식구(食口)란 한 상에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이들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성만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함께 떡과 잔을 나누는 이를 단단하게 묶는 의식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메우므로 연대와 연합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이 의식은 공동체의 지향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목적하는 바가 세상이 아니라 하늘임을 천명합니다.
그런데, 하나 되게 하는 이 성만찬 의식이 도리어 교회의 하나 됨을 방해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러니합니다. 초대교회에서조차도 이 문제는 시끄럽고 복잡했습니다(고전 11:20~34). 교회가 제도화된 후 주님의 만찬은 예배 의식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만찬에 대한 신학이 조금씩 차이가 생겼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를 화체설이라 주장하고, 개혁교회에서는 공재설, 임재설, 상징설, 기념설 등으로 신학적 차이를 둡니다. 이 차이 때문에 지금도 교회는 분열되거나 또는 일치에 이르지 못했고, 여전히 공통의 하나된 예전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믿는 역사적 교회는 교리와 예전의 차이를 무론하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교훈과 대속적 삶의 결정체로서 성만찬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문제로 하나 되기가 어려웠지만 이 때문에 하나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성만찬 의식에서 주님과 일체된 정체성을 확신하며 변화된 삶을 채근하는 주님의 의도하심을 읽습니다. 한 길 가는 벗의 한몸의식을 되새깁니다.
2024. 3. 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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