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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으시다
마가복음 15:33~47
진리는 상식에 부합합니다. 상식에 맞지 않는 진리는 의심스럽습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납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아무것도 거두지 못합니다. 착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산 자가 성공에 이릅니다. 남을 속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사는 자는 법의 제재를 받고 마땅한 대가를 치릅니다. 의인이 칭찬을 듣고 악인은 벌을 받습니다. 진리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일들이 더러 일어납니다. 거짓말을 하고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들이 이들이 도리어 젠체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상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진리는 상식을 초월합니다.
진리에는 역설성이 있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지 많이 배운 사람은 겸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자는 스스로 낮아져야 하고, 많이 얻으려면 가진 것을 버려야 합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죽어야 삽니다. 어둠이 짙어야 빛이 도드라지는 법이고, 돌 위에도 꽃을 피우는 원리가 있습니다.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일도 그런 이치입니다. 가난에 처하면서도 비굴해지지 않고 부요함에 이르러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남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약자의 편에 묵묵히 섭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의 역설성에 대한 깨달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구도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기쁨보다 근심이 많은 이유는 역설의 진리를 거부하고 순리와 상식으로만 살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은 역설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로부터도 버림받았지만,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래야 인류가 살기 때문입니다. 이는 창세 초에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창 3:21)는 말씀의 성취인 셈입니다.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는 죄 없는 누군가의 희생이 전제되었고 성경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사 53:7)으로 특정했으며 세례자 요한은 이를 확정하였습니다(요 1:36). 인류 구원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 주님의 시신을 달라하여 수습해 장사지냈습니다. 그는 유대 전통에 속해 있으면서도 당시 종교에 함몰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지성적 신앙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시대성에 함몰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 교회가 역설을 간과하고 상식에만 머물면 유대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같은 순전한 자세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립니다.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교회를 초월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2024. 3. 3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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