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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원칙
신명기 20:1~20
요즘 ‘법과 원칙에 따라’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끝에는 늘 ‘엄정하게’라는 말이 다릅니다.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구성원 가운데에 어떤 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방식이 다른 사회구성원에게 불편을 주거나 피해를 줄 때 이를 마뜩잖게 여기는 사회 기득권층과 공권력을 쥔 정부는 ‘법과 원칙’이라는 무기를 들고 ‘엄정하게’ 대응합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늘 쫓기듯 사는 사회적 약자들의 피해의식과 상실감을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으로 ‘법과 원칙’에 호소하기도 하지만 ‘엄정하게’ 이루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법과 원칙’이 과연 늘 좋은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국가의 권력이 국민의 의사에 따라 제정된 법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근대 입헌 국가의 정치 원리를 ‘법치주의’라고 합니다. 법과 원칙이 지켜지는 법치주의 사회는 정말 좋은 세상일까요? 히틀러의 나치스는 뉘른베르크법(1935)을 제정하여 반유대주의의 야수성을 노골화합니다. 이 법에 의하면 독일의 적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인종적인 적입니다. 유대인과 집시가 이에 해당합니다. 둘째는 정치적인 적입니다. 이에는 사회주의자와 진보적 기독교인과 반동자를 포함합니다. 세 번째는 도덕적인 적인데 동성애자와 범죄자와 부랑자를 포함합니다. 이 법에 의하여 유대인들은 회사에서 쫓겨나고, 학교 입학이 불허되고 농장이나 언론사를 소유할 수 없었고 법관이나 변호사의 직업에서 배제되었으며 유대인의 기업은 약탈되고 제품은 불매되었고 심지어는 우생정책에 의하여 열등인종 강제 불임시술이 자행되었으며 사법제도에 의하지 않고도 인신 구속하여 강제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시민권이 박탈당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법이라고 이해합니다.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으며 변개할 수 없는 진리로 받습니다. 성경을 읽다 이해되지 않거나 정당한 의구심이 있어도 성경 친화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해석되지 않더라도 훗날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듯 확실해질 때가 이르리라 생각하며 모난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런데도 선뜻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에 있는 성읍을 점령하였을 때에는, 숨 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면 안 됩니다.”(20:16)
과거에 우리는 장애인으로 사는 일이 개인과 가정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애인이 살기 불편한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기본적 인간의 가치는 존중해야 합니다. 전에는 장애인의 휠체어가 갈 수 없는 계단 앞에서 한숨을 쉬며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계단 대신 비탈길이나 엘리베이터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야 합니다. 장애인이 살 수 없는 세상은 비장애인에게도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성경은 불변하나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주님, 사랑보다 좋은 법은 없고, 환대만큼 훌륭한 원칙은 없습니다. 성경은 배제와 차별의 법이 아니라 관용과 환대의 법이라고 이해합니다. 그 가치를 잘 따를 수 있는 지혜와 용기 주시기를 빕니다.
2024. 4. 3(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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