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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편지 제18호 2000.1.1
출처 피씨통신 하이텔 케이씨엠 목회자료실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막 1:17)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요 21:2-11)
부르심이란 무엇일까.
예수는 베드로를 부르셨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 사람을 낚다니 무엇으로 어떻게 낚는다는 말인가.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디에서 어디로 끌어올리면 낚는 것인가. 도대체 우리 인생은 어찌 되어야 낚이고 또 낚는 어부가 될 것인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베드로는 예수에게 낚였는가. 예수께서 베드로를 낚기 위해 어떤 일을 시작하셨으며 어떻게 마치고 계신가. 저 넓은 대양에서 물고기를 끌어올려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인가.
예수의 낚시밥에 베드로는 입질을 시작했다. 떡밥의 맛을 보고 한 번 입질을 시작한 베드로, 그러나 그는 덥석 미끼를
물고 그렇게 쉽게 걸려들지 않는다. 미끼 주위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맴돌고 있ㅍ다는 것은 언젠가 낚시꾼의 의도대로 물게 될 터이다. 그것만 보아도 그는 낚시꾼의 덧에 걸린 셈이다. 그러나 요동치는 사방의 물결과 풍랑이 쉽게 미끼를 물게 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것이 아니었다. 비록 미끼 주위를 맴돌고 그 맛에 취해 있어서 언제인가는 그 동안 바다의 그 어떤 먹이보다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저 먹이를 한껏 베어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베드로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먹이를 향하여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허나 아직은 모른다. 저 먹이를 통째로 나꿔채는 순간 지금껏 나의 삶의 터전이었고 온갖 풍요가 있던 바다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바다를 잃는 것은 곧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닌가.
멋도 모르고 떡밥에 춤을 추고 있는 베드로. 바다를 잃는 것이 낚이는 것이라면 진작 입질을 포기하고 바다의 풍요나 마음껏 누리며 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어찌 하랴. 그렇게만 살 수 없도록 이미 유혹(?)은 시작되었으니. 허나 잠시 다른 생각을 해본다. 그렇지. 어찌 바다속만이 내 삶의 전 영역이겠는가. 또 다른 세상이 있을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바다 밖의 또 따른 세계로 나가 볼 수 있는 길이 있지 않겠나. 혹 아는가. 저 달콤한 먹이가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 줄는지. 그렇다. 바다를 잃는 것이 낚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먹이가 되는 것. 그것이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물고기를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는 창조자였다. 어디 경작할 사람이 있는가. 기껏해야 하늘을 나는 조류, 바닷속의 어류 밖에 더 있는가. 땅에는 겨우 안개만 피어 오르고 있다. 혼돈과 공허가 뒤덮여 있다. 온통 자아가 판을 치며 인생은 자아에게 잡아 먹혀있고, 도무지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자아라는 큰 물고기 배속에 갇혀있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어 있는 자기.
예수는 이 물고기를 잡아 올려 바다와 결별케 하여 죽여 버린 다음, 그 속에 있는 자기를 부활시키시려 하신다. 따라서 자기는 자아의 속성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바다의 논리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바다와 결별하고 사람의 세계로 나가게 하는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를 사람 만들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는, 낚아내는 어부로 삼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베드로를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고.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허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사람도 사람 나름, 첫 사람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둘째 사람 곧, 하늘에 속한 사람을 빚어가고 계시니. 아 사람을 낚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더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는 베드로를 낚기 위해 나를 따르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를 사람 만들고자 마침내 십자가를 지신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맏아들 예수께서 잘 보여 주신다. 그리고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
사람낚는 어부가 되고자 하는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먼저 낚여라. 어부에게 잡혀서 먹이가 되라. 그리고 사람이 되어라. 그런 다음 스스로는 아무리 그물질 하여도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도 주목하자.
예수는 말씀 하신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지라고. 그의 말씀이 들려지면 이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면 된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띄고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띄우리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오. 주님, 나는 결코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주께서 너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김창호
출처 피씨통신 하이텔 케이씨엠 목회자료실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막 1:17)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요 21:2-11)
부르심이란 무엇일까.
예수는 베드로를 부르셨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 사람을 낚다니 무엇으로 어떻게 낚는다는 말인가.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디에서 어디로 끌어올리면 낚는 것인가. 도대체 우리 인생은 어찌 되어야 낚이고 또 낚는 어부가 될 것인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베드로는 예수에게 낚였는가. 예수께서 베드로를 낚기 위해 어떤 일을 시작하셨으며 어떻게 마치고 계신가. 저 넓은 대양에서 물고기를 끌어올려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인가.
예수의 낚시밥에 베드로는 입질을 시작했다. 떡밥의 맛을 보고 한 번 입질을 시작한 베드로, 그러나 그는 덥석 미끼를
물고 그렇게 쉽게 걸려들지 않는다. 미끼 주위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맴돌고 있ㅍ다는 것은 언젠가 낚시꾼의 의도대로 물게 될 터이다. 그것만 보아도 그는 낚시꾼의 덧에 걸린 셈이다. 그러나 요동치는 사방의 물결과 풍랑이 쉽게 미끼를 물게 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것이 아니었다. 비록 미끼 주위를 맴돌고 그 맛에 취해 있어서 언제인가는 그 동안 바다의 그 어떤 먹이보다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저 먹이를 한껏 베어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베드로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먹이를 향하여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허나 아직은 모른다. 저 먹이를 통째로 나꿔채는 순간 지금껏 나의 삶의 터전이었고 온갖 풍요가 있던 바다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바다를 잃는 것은 곧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닌가.
멋도 모르고 떡밥에 춤을 추고 있는 베드로. 바다를 잃는 것이 낚이는 것이라면 진작 입질을 포기하고 바다의 풍요나 마음껏 누리며 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어찌 하랴. 그렇게만 살 수 없도록 이미 유혹(?)은 시작되었으니. 허나 잠시 다른 생각을 해본다. 그렇지. 어찌 바다속만이 내 삶의 전 영역이겠는가. 또 다른 세상이 있을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바다 밖의 또 따른 세계로 나가 볼 수 있는 길이 있지 않겠나. 혹 아는가. 저 달콤한 먹이가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 줄는지. 그렇다. 바다를 잃는 것이 낚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먹이가 되는 것. 그것이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물고기를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는 창조자였다. 어디 경작할 사람이 있는가. 기껏해야 하늘을 나는 조류, 바닷속의 어류 밖에 더 있는가. 땅에는 겨우 안개만 피어 오르고 있다. 혼돈과 공허가 뒤덮여 있다. 온통 자아가 판을 치며 인생은 자아에게 잡아 먹혀있고, 도무지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자아라는 큰 물고기 배속에 갇혀있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어 있는 자기.
예수는 이 물고기를 잡아 올려 바다와 결별케 하여 죽여 버린 다음, 그 속에 있는 자기를 부활시키시려 하신다. 따라서 자기는 자아의 속성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바다의 논리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바다와 결별하고 사람의 세계로 나가게 하는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를 사람 만들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는, 낚아내는 어부로 삼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베드로를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고.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허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사람도 사람 나름, 첫 사람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둘째 사람 곧, 하늘에 속한 사람을 빚어가고 계시니. 아 사람을 낚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더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는 베드로를 낚기 위해 나를 따르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를 사람 만들고자 마침내 십자가를 지신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맏아들 예수께서 잘 보여 주신다. 그리고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
사람낚는 어부가 되고자 하는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먼저 낚여라. 어부에게 잡혀서 먹이가 되라. 그리고 사람이 되어라. 그런 다음 스스로는 아무리 그물질 하여도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도 주목하자.
예수는 말씀 하신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지라고. 그의 말씀이 들려지면 이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면 된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띄고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띄우리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오. 주님, 나는 결코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주께서 너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김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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