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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놀이
신명기 23:19~24:9
현대 사회에서 금융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입니다. 아무리 개인의 재능과 아이템이 탁월하고 사업적 수완이 뛰어나더라도 금융 지원을 받지 못하면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금융이란 돈의 융통, 곧 돈의 흐름을 말합니다. 여유 있는 자가 저축한 돈이 투자자에게 이동하여 경제의 원활한 흐름을 촉진하는 역할이 금융산업입니다. 돈의 수요와 공급은 이자율과 경제주체들의 기대심리 등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돈의 주목적은 교환입니다. 그러나 이자는 교환이 아니라 돈의 양을 증대시킵니다. 탐욕이 스며들 여지가 상당히 큽니다. 재화를 획득하는 수단에서 가장 잘못된 것이 이자 수익입니다.
그래서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상식의 세상에서는 이를 금했습니다. 고대사회조차도 이자 수익을 불순하게 여겼습니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이자를 붙여서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돈을 빌린 사람은 이자도 원금도 일절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치학》에서 “재화를 획득하는 모든 방식 중에서, 가장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다”고 하여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물론 성경도 이자 수익을 금하고 있습니다. 불로소득이라는 측면도 있고, 자신과 주변의 파멸이 불 보듯 뻔하며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싼값에 물건을 사서 비싸게 파는 상업을 일종의 사기 행위로 본 동양의 유교 사상가들이 농업을 천하의 근본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자본이득을 배척한 공산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와 이슬람교도 금융업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금융업은 산업의 꽃입니다. 필요악으로 여겨졌던 이자놀이가 이제는 당당하고 뻔뻔해졌습니다. ‘금융이 왜 나쁜가’의 문제는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금융이 왜 좋은가’는 상당한 지식을 요구합니다. 고리대금은 악하지만 고리대금을 통해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다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은 동족에게 꾸어 주었거든 이자는 받지 마십시오. 돈이든지 곡식이든지, 이자가 나올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23:19)
유대민족은 이 말씀에 의지하여 이자놀이를 금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고 교회가 세계를 취락펴락 할 때 유대인은 메시아를 죽인 민족이라는 오명을 쓰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고 배제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대부업을 금했습니다. 유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교회가 금기시하는 이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뜩이나 혐오의 대명사인 유대인이 더 혐오스러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국 사람에게는 꾸어 주고서 이자를 받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동족에게서는 이자를 받지 못합니다.”(23:20)
이 말씀 앞에서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인지부조화로 비칩니다. 자기 민족에게는 금하는 일을 외국인에게는 허용하는 저의가 무엇일까요? 자기 민족에게 나쁜 것은 다른 민족에게도 금해야 하지 않을까요? 만일 <신명기>가 이 시대에 다시 기록된다 하여도 그렇게 씌어질까요?
주님, 저희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시장은 하나님의 자리에 등극하여 무소불위의 위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돈에게 영혼을 팔고 싶지 않습니다.
2024. 4.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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