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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
신명기 27:1~26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그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
아, 나는 한 길을 또다른 날을 위해 남겨두었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기에
내가 다시 오리라 믿지는 않았지.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의 <가지 않은 길>입니다. 시인은 두 길 앞에서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어느 길을 걸을 것인가? 그러다가 한 길을 선택하는데 훗날 그 길을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그렇게 묘사하므로 자기 선택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두 길 사이에 차이는 없습니다. ‘더 끌렸던 다른 길’일뿐 이 길이 저 길보다 ‘좋다’거나 ‘옳다’거나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요단강을 건넌 뒤에, 백성에게 축복을 선포하려고 그리심 산에 설 지파들은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리고 저주를 선포하려고 에발 산에 설 지파들은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 지파입니다.”(27:12~13)
이스라엘은 ‘그 길’을 걷는 백성입니다. 그 길에는 지켜야 할 질서가 있습니다. 모세는 세겜을 사이에 둔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언급합니다. 특히 ‘저주 십계명(또는 십이계명)’은 ‘저주’와 ‘아멘’의 반복을 요구합니다(11~26). 저주 십계명의 요점은 ‘이웃’입니다. 이웃을 아프게 하는 이에게 저주가 임합니다. 죄의 은밀함은 사법처벌을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주님, 인생은 그림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존재합니다. 선택은 할 수 있지만 결과는 낙관할 수 없습니다. 갈림길에 선 인생에게 주시는 저주의 십계명은 정신 차리고 살라는 말씀으로 받습니다.
2024. 4. 1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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