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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화가의 복
신명기 28:1~14
화가 가운데 성공한 사람을 한 사람 꼽으라면 바로크의 대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플랑드르의 안트베르펜에 작업실을 두고 로마가톨릭교회의 반동종교개혁 선봉에서 교회를 보호하고 역동성과 관능미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의 부친 장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의 법률가였습니다. 신실한 칼뱅주의자이기도 한 아버지는 에스파냐의 알바 공작 때에 핍박을 피해 독일 쾰른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루벤스는 3살 되던 해에 어머니와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로마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며 훗날 그의 미술 세계의 근간이 되는 라틴어와 고전 문학 등 인문학을 배웠습니다. 14살 때부터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르네상스 화가인 라파엘로(1483~1520)와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인 한스 홀바인(1497~1543), 그리고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레이몬디(1480~1534)의 작품을 모작하면서 공부하였습니다.
23살이 되던 해에 미술의 고향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티치아노(1490~1576)와 틴토레토(1518~1594), 카라바조(1571~1610)의 미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만토바의 공작 빈첸초 1세(1562~1612)의 총애를 받으며 피렌체와 로마를 방문하기도 하였고 1603년에는 빈첸초 1세의 외교 사절로 에스파냐를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1608년까지 로마에 머물면서 그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608년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후 미술에 전념하였습니다. 안트베르펜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제단화인 그의 작품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리스도>(1610)와 <십자가에서 내리는 그리스도>(1611~1614)는 훗날 영국 소설가 위다의 <플랜더스의 개>에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메디치가의 프랑스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 1573~1642)의 요청으로 그녀의 남편 앙리 4세의 삶을 묘사하는 작품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루벤스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와 영국의 찰스 1세로부터 기사 칭호를 부여받은 영예로운 외교관이기도 하였습니다.
루벤스와 견줄만한 동시대의 네덜란드 화가로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1606~1669)가 있습니다. 그는 해외에서 활동한 경력은 없지만 예술 분야에서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불러온 화가로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입니다. 그의 모친은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였으나 렘브란트는 개혁교회 신자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개혁교회 신자로서 화가의 길을 걷는 일은 밥벌이하기도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칼뱅주의 영향으로 교회는 성상을 제거하였고, 미술의 주 소비층인 교회가 미술 구매를 하지 않으므로 천재 화가의 비운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내와 자녀들의 죽음이 이어졌고 파산에 이르기까지 경제가 궁핍하였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예술혼은 어둠 속에서도 빛났습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당신들에게 찾아와서 당신들을 따를 것입니다.”(28:2)
두 천재 화가의 삶이 판이함을 보며 주님의 말씀이 생경합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행하면 복이 임한다’는 말씀을 의심하지 않습니다만 현실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다가 고난에 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현실의 축복 그 너머의 은총을 바라보는 믿음을 주십시오.
2024. 4. 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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