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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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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협력의 사랑에 웁니다.
목사도 화를 낼 때가 있고 웃을 때도 있습니다.
목사에게도 아픔이 있고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가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현실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싶을 때,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부족하고
모자람 투성이를 발견할 때 이제까지 무엇하며 살았는가 하는 자괴지심에 화가 납니다.
목사가 웃을 때는 자신의 기쁨이 넘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고난가운데서 벗어나
활짝 웃는 모습을 볼 때 목사의 얼굴은 파안대소(破顔大笑)되어 가슴이 기쁨으로 터질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목사가 아파하는 것은 자신의 아픔 때문이 아니라
작은 자들이 큰 자들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하고, 진실이 거짓에 짓눌릴 때,
그럴 때 목사는 그 어느 때보다 아픔에 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항상 연구하고 묵상하고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도력을 축적하기 위해 가히
몸부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목사가 책을 보지 못하면, 기도생활이 안되면, 묵상 훈련이 없으면
영력을 잃고 목회 일반행정의 권위가 없음은 물론 설교에도 생명력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책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하며,
기도의 십일조를 드리기를 힘쓰고,
주간에 하루쯤은 주님과의 대화를 위해 어느 한날을 묵상과 연구의 날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들이 많다는 것 때문에 신문이나 주간 시사를 읽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늘 목양의 부족함에 마음이 무거운데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아름다운
목회 협력의 사랑의 손길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건 정말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고 가장 순수한 목회 협력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전화 한 통화로 목사를 위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목사가 생각나면 먹던 것도 나눌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목사를 만나면 따듯한 미소를 보내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에게 있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목회 협력은 K 장로님의 사랑입니다.
그분은 주간에 시사문제, 혹은 일간지를 보면서
"이것은 목사님의 목회와 설교에 도움이 되겠구나"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스크랩하여
주일 아침마다 목사의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것이 분명 쉬운 일이 아닐텐데...
그러면서도 말이 없습니다. 종종 침묵이 너무 삭막하다고 생각되면 "제 사표서 입니다."라고
농담을 하시면서 빙긋이 웃고 나가십니다.
그런데 그 말을 처음 들을 때는 그냥 웃고 지나쳤는데 두고 두고 그 말이 목사의 가슴에
은혜로 다가옵니다.
그 말씀은 "나는 장로로서 주일마다 사표를 내는 심정으로 직분을 감당합니다."라는 말로
들려지기 시작했고 그 의미를 되새김질 해보니 겸손과 사명이 복합적으로 내재된
고백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국 방방곡곡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간증할 때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나누는 것도 가식이 아닌 진솔한 삶의 고백이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오늘도 목회
협력의 기쁨은 어떤 대단한 것에서가 아니라 작은 일에서 오는 것임을 생각해 봅니다.
아름다운 목회 협력을 하는 성도의 사랑은 무엇인가?
나의 목회 현장에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계십니다.
신문 스크랩을 해 주시는 분,
귀한 자료를 친히 컴퓨터를 통해 정리하여 보내 주시는 분,
설교의 언어구사를 보다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어휘력을 깨우쳐 주시는 분,
좋은 목회 자료로 생각되면 어김없이 보내주시는 분,
때로는 목사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좋은 약을 보내 주시는 분,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면 금방 다가와 걱정하면서 건강을 위해 조언을 해 주시는 분,
어떤 때는 매고 있는 넥타이가 양복 색깔과 맞지 않다고 좋은 넥타이를 사 주시는 분,
그렇게 다양한 목회 협력의 은사를 받은 분들의 도움으로 오늘도 목사는 힘차게 행보하며
거룩한 목양의 지팡이를 굳게 잡게 됩니다.
목사는 혼자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님을 살아가면서 더욱 깨닫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뵈뵈와 루디아 처럼 나에게 있어서 수많은 신실한 목회 협력자들의 이름을 목회 일지에
기록할 때마다 그 고마움을 표현할 길 없어 기도하는 눈망울이 젖어집니다.
주께서 그 모든 이들에게 은혜를 더하시기를 간구하며...
오늘도 목사는 성도들의 아름다운 목회 협력의 사랑에 다시 눈시울이 젖습니다
목사도 화를 낼 때가 있고 웃을 때도 있습니다.
목사에게도 아픔이 있고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가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현실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싶을 때,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부족하고
모자람 투성이를 발견할 때 이제까지 무엇하며 살았는가 하는 자괴지심에 화가 납니다.
목사가 웃을 때는 자신의 기쁨이 넘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고난가운데서 벗어나
활짝 웃는 모습을 볼 때 목사의 얼굴은 파안대소(破顔大笑)되어 가슴이 기쁨으로 터질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목사가 아파하는 것은 자신의 아픔 때문이 아니라
작은 자들이 큰 자들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하고, 진실이 거짓에 짓눌릴 때,
그럴 때 목사는 그 어느 때보다 아픔에 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항상 연구하고 묵상하고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도력을 축적하기 위해 가히
몸부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목사가 책을 보지 못하면, 기도생활이 안되면, 묵상 훈련이 없으면
영력을 잃고 목회 일반행정의 권위가 없음은 물론 설교에도 생명력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책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하며,
기도의 십일조를 드리기를 힘쓰고,
주간에 하루쯤은 주님과의 대화를 위해 어느 한날을 묵상과 연구의 날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들이 많다는 것 때문에 신문이나 주간 시사를 읽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늘 목양의 부족함에 마음이 무거운데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아름다운
목회 협력의 사랑의 손길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건 정말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고 가장 순수한 목회 협력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전화 한 통화로 목사를 위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목사가 생각나면 먹던 것도 나눌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목사를 만나면 따듯한 미소를 보내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에게 있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목회 협력은 K 장로님의 사랑입니다.
그분은 주간에 시사문제, 혹은 일간지를 보면서
"이것은 목사님의 목회와 설교에 도움이 되겠구나"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스크랩하여
주일 아침마다 목사의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것이 분명 쉬운 일이 아닐텐데...
그러면서도 말이 없습니다. 종종 침묵이 너무 삭막하다고 생각되면 "제 사표서 입니다."라고
농담을 하시면서 빙긋이 웃고 나가십니다.
그런데 그 말을 처음 들을 때는 그냥 웃고 지나쳤는데 두고 두고 그 말이 목사의 가슴에
은혜로 다가옵니다.
그 말씀은 "나는 장로로서 주일마다 사표를 내는 심정으로 직분을 감당합니다."라는 말로
들려지기 시작했고 그 의미를 되새김질 해보니 겸손과 사명이 복합적으로 내재된
고백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국 방방곡곡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간증할 때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나누는 것도 가식이 아닌 진솔한 삶의 고백이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오늘도 목회
협력의 기쁨은 어떤 대단한 것에서가 아니라 작은 일에서 오는 것임을 생각해 봅니다.
아름다운 목회 협력을 하는 성도의 사랑은 무엇인가?
나의 목회 현장에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계십니다.
신문 스크랩을 해 주시는 분,
귀한 자료를 친히 컴퓨터를 통해 정리하여 보내 주시는 분,
설교의 언어구사를 보다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어휘력을 깨우쳐 주시는 분,
좋은 목회 자료로 생각되면 어김없이 보내주시는 분,
때로는 목사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좋은 약을 보내 주시는 분,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면 금방 다가와 걱정하면서 건강을 위해 조언을 해 주시는 분,
어떤 때는 매고 있는 넥타이가 양복 색깔과 맞지 않다고 좋은 넥타이를 사 주시는 분,
그렇게 다양한 목회 협력의 은사를 받은 분들의 도움으로 오늘도 목사는 힘차게 행보하며
거룩한 목양의 지팡이를 굳게 잡게 됩니다.
목사는 혼자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님을 살아가면서 더욱 깨닫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뵈뵈와 루디아 처럼 나에게 있어서 수많은 신실한 목회 협력자들의 이름을 목회 일지에
기록할 때마다 그 고마움을 표현할 길 없어 기도하는 눈망울이 젖어집니다.
주께서 그 모든 이들에게 은혜를 더하시기를 간구하며...
오늘도 목사는 성도들의 아름다운 목회 협력의 사랑에 다시 눈시울이 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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