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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
신명기 32:15~33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의 광야 길을 걷는 동안 그들에게 하나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하나님 없는 이스라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의 시작도 하나님이셨고 과정도 하나님이셨으며 완성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에 이른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삶이 윤택해지고 선택할 자유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 먹거리가 넉넉해지고, 실컷 먹고 나더니,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반석이신 구원자를 업신여겼다.”(32:15)
배가 부르고 평안해지니까 하나님이 거추장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주권자를 버리는 행위는 자신의 출생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영락없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이고, 토사구팽(兔死狗烹)입니다. 토끼를 사냥한 후 쓸모없어진 사냥개를 주인이 삶아 먹는 이치와 다름없습니다. 문제는 과연 하나님이 쓸모없어진 사냥개 같은 존재인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여정에서도 절실한 분이셨지만 정착 생활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분입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만 잠깐 등장하는 구원투수가 아닙니다.
진짜 위기는 역경의 때에 오기보다 순풍의 때에 옵니다. 가난할 때보다 부요할 때 옵니다. 아무 힘도 없을 때보다 작은 힘이라도 갖추고 자랑하고 싶을 때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10:12)는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그리고 민족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 고군분투한 부부가 안락함이 찾아오면 균열이 생기기 십상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버텨온 교회가 해방 후 분열의 길을 치달린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일제강점기 엄혹한 시절에 굶어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 맞아 죽을 각오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애국지사들이 해방이 되자 권력을 차지하려고 고난을 함께 한 어제의 동지를 적으로 간주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시 119:71)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절절합니다.
“내가 온갖 재앙을 그들에게 퍼붓고, 나의 화살을 모조리 그들에게 쏘겠다. 나는 그들을 굶겨서 죽이고, 불 같은 더위와 열병으로 죽이고, 짐승의 이빨에 찢겨서 먹히게 하고, 티끌 속을 기어 다니는 독사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겠다. 바깥에서는 칼에 맞아 죽고, 방 안에서는 놀라서 죽으니, 총각과 처녀, 젖먹이와 노인, 모두가 다 같은 꼴을 당할 것이다.”(32:23~25)
주님의 분노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 평정심을 되찾으십니다.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만이 살길입니다.
“원수들이 자랑하는 것을 내가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주가 내 백성을 징벌한 것인데도, 원수들은 마치 저희의 힘으로 내 백성을 패배시킨 것처럼 자랑할 터이니, 그 꼴이 보기가 싫어서 내가 내 백성을 전멸시키지는 않았다.”(32:27)
주님, 은혜가 아니면 설 수 없는 죄인임을 다시 자각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의 은총만을 앙망합니다.
2024년 4월 23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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