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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사람_생각 없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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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제는 ‘맹목의 신앙’에 대한 상대개념이다. ‘인간은 죄인’이고 ‘불완전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사랑의 절대자이시니 무조건 믿고 보자’거나, 생각한다는 것이 자칫하면 ‘하나님을 향한 불경’으로 이해된다고 여기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다 보니 막무가내 맹신주의가 이 시대 신앙의 주류를 이루고 말았다. 복음 진리에 담긴 정신과 가치보다는 현실을 강조한 기복주의가 기승을 떨쳤고,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보다는 국가주의와 개교회주의 신앙이 편만해졌다. 이런 세태에 ‘정말 그런가’고 의문을 제기하거나 ‘골똘한 생각’을 강조하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고 위험인물로 지목될 수도 있다. 학습된 자신의 편협한 신학 주장만을 겁박하다시피 강조하므로 ‘생각하기’를 막고 방해하는 이들이 얻은 성과물인 셈이다.
물론 ‘생각’이 만능은 아니다. ‘생각’이 모든 존재의 전제는 아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 이후의 문제이다. 인식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한다. 쉽게 말해 태어나지 않았으면 생각도 없다. 출생은 인식과 이해의 결과가 아니다. 사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누구지?’ 인식하기 시작한다. 인식과 이해의 첫 질문 격인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은 계시는가?’ 역시 존재의 이유가 아니라 그 결과이다.
‘계시’와 ‘인식’의 경우도 그렇다. 자신의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계시는 인식 이전에 주어졌다. 모든 학문은 동일한 방법론에 기초하여 연구한다. 우주공학과 정치학이 그 주제와 언어와 표현이 서로 달라 무관한 것 같지만 학문하는 원리는 동일하게 이미 존재하는 자료에 이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신학은 초월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다 보니 신학은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이성의 역할이 다른 학문과 다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을 ‘계시’라고 한다. 계시란 극장의 막을 열거나 보자기를 풀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과 뜻을 인간에 보이시는 신적 행위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일반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계시이다. 일반계시란 인간이 보편의 삶을 살도록 하는 하나님의 배려로서 자연, 양심, 역사, 이성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별계시란 인류의 구원과 관련된 계시로서 성경이 그 밑절미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인간의 구원과 삶에 적절한 가르침을 준다고 믿는다. 성경은 인간에게 무엇을 믿을 것인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가장 확실한 교훈을 주는 책이다. 신앙과 삶의 규범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원전(原典)을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경은 인간의 수준에 맞춰 자신을 낮추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가르침은 대상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법, 유치원 어린이에게는 ‘하나, 둘, 셋’ 숫자를 가르치고, 문맹인은 ‘가갸거겨’부터 배운다. 이 사실을 무시하면 가르침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모세오경은 ‘반이집트’ 의식으로 하나 되어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공동체가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특히 십계명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다. 하나님은 갓 출애굽 한 이들의 영적 수준에 맞는 언어로 계명을 주셨다. 대부분이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표현은 유아기의 이스라엘에 적합한 표현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마22:35~40)의 긍정언어로 바꾸셨다. 나는 어린 시절에 말썽을 부려 부모님으로부터 ‘너 학교 가지 말라’는 책망을 듣고 여러 날 서러워했던 적이 있다. 그 말이 악의의 언어가 아니라 독려와 재촉의 긍정언어인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성경을 문자주의로 이해할 때의 함정이 바로 이렇다. 우주에 가득하신 하나님을 문자로 가둘 수는 없다. 하나님은 문자보다 크신 분이다. 초월의 하나님이 한계의 존재인 인간에게 계시할 때 인간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를 충분히 감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을 바라보는 신학의 관점이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으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진보적인 입장인데 이는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으로서 부단한 신학 작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존주의 입장인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 주장에 의하면 성경을 누구나 읽는다고 같은 감동이나 동일한 결과에 이르지 않는다. 교양을 위해 성경을 읽는 스님과 한 끼 식사를 위하여 30장의 성경을 읽어야 하는 꽃제비의 경우는 구도자의 성경읽기와 다르다. 같은 성경이라도 그것을 대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 진리의 감도와 감동의 정도가 다르다.
처음 성경이 우리글로 번역될 때 그것은 오백 년 유교가 만든 각종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 존중의 가치를 대변하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성경 언어들은(귀먹어리, 벙어리, 절뚝발이, 문둥이 등) 오늘의 인권 감수성에 미달한다. 성경은 변하지 않지만 세상이 변한 것이다. 마땅히 성경해석도 변해야 한다. 생각 없이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_2019.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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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썼던 글들을 꺼내본다.
사진처럼 책 한 권 묶고 싶다.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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