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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인간관, 인간의 신관
시편 103:1~14
흔히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있으며 정치적 행위를 통해 공공의 선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물리적 힘은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 몸무게의 두 배를 들기가 어렵지만 개미는 자기 몸무게의 10배를 거뜬히 들며 5천 배까지 끌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능력이 대단해 보여도 자연에는 사람보다 우월한 생물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103:14)
주님이 보시는 인간관은 낙천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생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알고 계십니다. 특히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재질은 흙이고 먼지이며 허무이고 절망입니다. 사람은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본래 정체성을 지키고 자존감을 유지하는 일도 버겁습니다. 인간은 수없이 실수하고서도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절망합니다. 한마디로 답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성은 갖췄으나 이성의 기능은 제한적입니다. 이 땅에 전쟁이 그치지 않는 것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어른의 싸움에 피해는 아이들이 고스란히 당합니다. 남자가 만든 전쟁에서 슬픔과 고통은 여성의 몫입니다. 수천 년 역사를 거듭해 오면서 알 만큼 알 텐데도 고칠 수 없는 광기와 야만이 인간성 속에 숨어있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다는 자만도,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교만도 부질없습니다. 인간론에 한가닥 희망을 갖기보다 먼저 절망하고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야말로 바른 인간 인식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계몽주의를 좋아하면서도 거기에 기대를 걸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 모든 병을 고쳐 주시는 분,”(103:3)
“주님은 공의를 세우시며 억눌린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변호하신다.”(103:6)
시편 저자가 인지하고 인식하는 하나님은 씻을 수 없는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동시에 사회 공의를 세우며 사회적으로 연약한 자를 편들어 주십니다. 시편 저자는 그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사랑에 끝이 없다’고 칭송합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공의로 이끄십니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대립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를 상대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어쩌다 이런 말장난에 빠져 형제에게 흠집을 내면서도 그 실상에 무지한지 답답합니다. 아비의 사랑받는 형을 시기하고, 어미의 관심을 받는 아우를 못마땅해하는 격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답답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조건 없는 용서와 무한한 사랑, 그리고 무엇이라도 품는 관용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택의 우월감에 사로잡혀 은혜를 독점하고 타자를 배제하는 잘못된 가르침에 경도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한 하나님은 세상을 평화와 공의로 이끄십니다.
주님, 인간의 죄와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며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기대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주님의 은혜가 세상에 편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공의가 서며 평화가 정착되기를 빕니다.
2024년 4월 27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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