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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시편 104:1~18
주전 6세기 이전의 고대 그리스는 신화가 아니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인간 만사를 신화와 전설로 설명하였습니다. 신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처럼 욕망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신화와 종교 외의 것으로 인생을 설명하려는 이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을 ‘철학자’라고 합니다. 신화와 종교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의식하고 이성의 기능을 통하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우주의 기원과 인간 역사의 원리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아르케’라고 하는데 밀레토스에 살던 탈레스(주전 624~ 주전 546)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육지가 물 위에 떠있다는 당시 세계관에 기반하였으나 철학적 사유에 의하여 보편자로서 아르케, 즉 만물의 원리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경험 너머의 궁극적 본성에 대하여 탐구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비이론적이며 비체계적이고 비합리적인 신화의 세계를 객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물은 양면성을 가진 물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물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물이 있어 가축들이 자라고 식물은 열매를 맺고 사람에게는 기름과 포도주를 제공하여 즐거움을 누리게 합니다. 만일 물이 없다면 인생은 곤고하고 괴로울 것이 뻔합니다.
“주님은,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어,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시니, 들짐승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들나귀들이 갈증을 풉니다. 하늘의 새들도 샘 곁에 깃들며,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서 지저귑니다. 누각 높은 곳에서 산에 물을 대주시니, 이 땅은 주님께서 내신 열매로 만족합니다.”(104:10~13)
물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셨습니다(창 1:2). 당시 세상은 뭍이 물에 갇혀있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셋째 날에 물에 잠긴 육지를 드러내시고 이를 ‘땅’이라고 하셨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행위를 매우 흡족해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생명을 허락하셨고, 여섯째 날에는 가축과 짐승, 그리고 창조 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사람을 지으셨습니다(창 1:9~31).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 자체가 구원 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 물에 갇혀있는 상태에서는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막거나 방해하는 장애물로 등장하는 것이 물, 또는 바다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그렇고, 홍해가 그렇고, 요단강이 그렇고, 요나를 삼킨 바다가 그렇고, 거라사 군대귀신이 몰살한 바다도 그렇습니다. 바다는 리워야단과 용과 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괴물의 서식지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에게 두려움과 혼돈의 장소입니다.
“주님은 경계를 정하여 놓고 물이 거기를 넘지 못하게 하시며, 물이 되돌아와서 땅을 덮지 못하게 하십니다.”(104:9)
그리스도인에게 바다는 극복의 대상입니다. 주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요 2:1~10). 그런데 이날이 사흘째 되는 날(요 2:1)이라고 명기하였는데 이는 창조의 셋째 날을 상기시킵니다. 광풍 이는 바다는 주님을 태운 배의 안정을 깨지 못했고(막 4:39), 베드로에게 바다는 실패의 자리입니다(요 21:6).
주님, 지금도 바다는 거칩니다. 자주 절망하고 넘어집니다. 혼돈과 공포와 무질서의 세계를 평정하여 주십시오. 바다에 침몰하지 않고 바다를 극복할 수 있도록 조화와 평화의 창조 원리를 따를 용기를 주십시오.
2024년 4월 29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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