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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
사도행전 5:12~26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있는 후 세상이 교회를 보는 눈이 더욱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어리둥절하며 신기하게’(2:6~7) 여겼고, ‘놀라기도 하면서도 조롱하기도’(2:12~13, 4:13) 하였고, ‘두려운 마음’(2:43)도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순수성이 결여된 헌금한 것이 탄로나 죽음에 이르자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5:5, 11) 하였습니다. 헌금의 가치는 액수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 하나, 감히 그들의 모임에 끼여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백성은 그들을 칭찬하였다.”(5:13)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평가의 기준은 크기나 규모나 위력이 아닙니다. <청춘> 1917년 7월호에 춘원 이광수가 <야소교의 조선에 준 은혜>에서 ‘사람을 차별하던 조선사회에 야소교는 신문명을 전하여 준 은인이며 평등 가치를 알려주었다’며 ‘도덕 진흥’과 ‘교육 보급’, ‘여성 지위 향상’, ‘사상의 자유 고취’, ‘한글 성경과 찬송가의 간행’, ‘농촌 계몽운동’ 등을 거론하며 기독교가 조선의 자각을 일으켰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이 땅 인구의 1%에 불과하였습니다. 하지만 춘원의 야소교에 대한 칭찬과 기대는 <청춘> 11월호에 기고한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결점>에서 우려와 비판의 언어로 변했습니다. 계급화된 교회 제도, 교회 지상주의, 교역자의 무식, 미신화된 신앙을 꼽으며 비판하였습니다. 춘원은 <매일신보>(1918. 9)에 연재하는 <신생활론>을 통해서도 ‘30년의 역사와 30만의 교도를 가진 야소교회가 신앙고백과 교리해석서 한 권 내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춘원의 비판이 있은 지 100년도 더 된 즈음에 그의 비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처음교회가 교회의 거룩성을 스스로 존중할 때 도덕성이 세워졌습니다. 이때 교회는 존중받았고 그리스도인은 칭찬받았습니다. 요즘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이유는 착한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정결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며 불의 앞에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교회는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조롱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주님, 지금 교회는 복음의 생명력과 무관하게 비대하고 강합니다. 보편에 터한 도덕성이야말로 부흥의 초석입니다. 본질을 우선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4년 5월 1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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