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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학당
사도행전 19:8~20
하나님의 은총은 유·무식을 따지지 않지만 믿음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지혜와 배움의 길을 걷습니다. 배움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 배움을 실체화합니다. 복음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자각하여 영혼의 구원을 확신하고, 복음이 사회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나라를 의식합니다. 복음은 연구와 학습을 불러일으키고 공부를 가열차게 하므로 풍성한 하늘의 은총을 누리게 하고 다음 세대의 좋은 유산이 되게 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문맹이 물러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세상이 밝아졌습니다. 지난 이천 년 복음 역사가 그랬습니다. 14세기 영국의 위클리프는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영국 사회의 지성화를 이끌었고,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체코어로 성경을 번역하였고 마르틴 루터도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여 근대 학문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교인의 무지를 부추기는 일은 미신입니다. 배움과 학문을 경시하는 일은 반복음적인 일입니다. 한국의 교인들은 공부하지 않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한번 구원에 이렀다는 확신이 공부의 필요성을 반감시키든지, 아니면 지도자의 무지와 얕은 지성이 교인의 무식을 방조하지는 않는지 되물을 만합니다. 한국교회는 사경회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유와 적용에 이르지 않는 신앙 지식은 화석화되기 마련입니다. 한국교회의 공부법은 한마디로 초등학교 저학년식 입니다. 아이들이 구구단을 외우는 이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높은 학문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교인들은 구구단을 10년, 20년 외우며 자랑하는 격입니다. 그런 이들은 구원에 이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숙한 삶과는 무관합니다. 한국교회는 공부를 학습처럼 시킵니다. 학습이란 지식이나 기술을 배워 익히는 일입니다. 복음 공부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받아쓰기가 아니라 글짓기에 이러야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머물며 두 해 동안이나 두란노서원에서 성도를 공부시킨 바울이 대단해 보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서, 날마다 두란노 학당에서 강론하였다. 이런 일을 이태 동안 하였다.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9~10)
주님, 주입식 교육과 외우기에 익숙한 한국교회 공부 방식이 변하기를 기도합니다. 스스로 묻고 사유하고 적용하는 성경 묵상이 일상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2024. 6. 1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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