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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0:12~24
말에는 맥락이 있고 글에는 여백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품에 안고 ‘에구 요 미운 강아지’라고 했다면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스럽다는 표현이며, 손자를 개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예쁘고 귀엽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법을 반어법이라고 합니다. 반어법의 대화를 직설화법으로 이해하면 사달이 생깁니다. 반어법으로 칭찬과 꾸중을 표현할 때, 겉으로는 칭찬이지만 실제는 꾸중이고, 겉으로는 꾸중 같지만, 사실은 칭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강한 부정은 긍정일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어법으로 역설법이 있습니다. 친구와 싸우고 들어온 자녀에게 ‘잘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꾸중하는 반어법입니다. 그러나 ‘지는 게 이기는 거야’라고 한다면 반어법이 아니라 역설법입니다. 귀찮게 싸움을 걸어오는 심술꾸러기 친구를 ‘상대하지 말고 무시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일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을 운동경기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말하려는 본질을 숨긴 채 듣는 이가 말의 뜻을 미루어 짐작하도록 에둘러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완곡어법이라고 하는데 대화에서 적절히 사용하면 상대를 배려하는 의도로 읽힐 수 있습니다. 말과 글에는 맥락과 여백이 있습니다. 이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말과 글의 자구에만 매인다면 오해와 분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처럼 같은 말이더라도 표현의 방법과 받아들이는 상태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말에는 속뜻이 있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가 맞은 곳은 치유되지 않는다.”(30:12)
유다는 치유할 수 없을 만큼 중증의 상태에 놓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태의 인간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엡 2:1)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고치지 못할 병이 없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빛을 발하고, 인간의 죄악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을 느낍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야곱의 장막들을 회복하여 놓고, 야곱의 거처를 불쌍하게 여겨, 폐허의 언덕에 다시 성읍을 세우고, 궁궐도 다시 제자리에 세우게 하겠다.”(30:18)
주님, 허물과 죄로 살던 저희는 말 그대로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칠 수 없는 인간의 절망을 주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크신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024. 7. 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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