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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해방
예레미야 34:8~22
사람이 천부적 인권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존중받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존귀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류 공동체가 부족 국가를 형성하여 계급화되면서부터 등외 인간이 생겨났고 그들은 사람이면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테네에서 데모크라시가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노예와 여자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1893년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고 영국에서는 1928년에서야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되는 등 여성의 참정권이 보편화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종교계 한 귀퉁이에서는 여성 사제를 제한하고 있어 인간의 생명과 가치 존중을 설교하는 종교가 자가당착에 빠져있다는 지적을 면치 못합니다. 러시아는 1861년에 농노해방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자유인 신분이 된 농노 출신 시민은 소작인이 되거나 도시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신분의 자유는 얻었으나 경제적 자유는 요원하였습니다. 미국은 1863년에야 노예해방을 선언하였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의 공격에 직면하여서 예루살렘 백성과 언약을 맺고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7년마다 안식년을 통하여 노예된 동족에게 자유를 주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어긋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중차대한 일을 바빌로니아의 칼끝 앞에서야 실행하였습니다. 잘한 일이기는 하지만 진작에 했어야 할 일입니다. 다행히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노예를 거느린 주인들이 이 언약에 동의하였습니다.
“모든 고관과 모든 백성은 이 계약에 동의하여, 각자 자기의 남종과 여종을 자유인으로 풀어 주고, 아무도 다시는 그들을 종으로 삼지 않기로 하고, 그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34:10)
이 약속은 몇 날 가지 못했습니다(11). 노예 주인들이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을 번복하고 노예들을 다시 잡아들였습니다. 기득권에 속한 이들의 반듯한 역사의식과 자발적 자기희생이 전제될 때 비로소 세상은 변합니다. 오늘의 교회가 조롱받는 이유는 기독교의 가치는 급진적인데 비해 교인들은 보수화된 때문입니다.
주님, 교회와 교인들이 기득권에 속해 있다보니 교회는 성경의 가치를 실현하지 못합니다. 철저한 성경의 역사의식과 자기희생의 모범을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024. 7. 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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