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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일관
예레미야 43:1~13
초지일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선한 의도로 시작하였더라도 그 선함을 유지하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과정에서 흔들리는 경우가 있고 스스로 의지를 꺾기도 합니다.
유력한 자들이 모두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에는 가난하고 뒤 쳐진 이들만 남았습니다. 바빌로니아는 공동화되다시피 한 유다의 총독으로 그달리야를 세웠습니다. 다행히 그달리야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현명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달리야의 리더십을 마뜩잖게 여긴 왕족 이스마엘이 총독을 살해하였습니다. 백지장도 맞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셈입니다. 이에 요하난과 아사랴(여사냐) 등 남아있던 유다의 지도자들이 이스마엘을 응징하기 위하여 일어났습니다. 다급해진 이스마엘은 암몬으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41:15). 졸렬하고 비겁한 지도자입니다.
이스마엘을 응징한 요하난 등의 행위가 의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의로움을 견지하지 못했습니다. 총독 살해의 책임을 물어올 바빌로니아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으로 이집트 피난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42:1~3, 5~6). 이미 결정하고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행위는 하나님을 기망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 땅에 머물라. 바빌로니아 왕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를 회복시키겠다’(42:10~1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남은 백성을 데리고 이집트 다바네스에 정착하였습니다. 그 행렬에 예레미야와 바룩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들은 의로운 예레미야와 바룩을 거짓말쟁이로 몰았습니다(2~3). 자기 결정을 미화하기 위하여 의로운 이들을 모욕주는 행위는 악한 일입니다. 악마를 대적하기 위하여 악마가 된 꼴입니다.
이집트는 결코 안전한 피난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면서 이집트를 맹신하는 요하난의 외교 형태는 지금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열강에게 민족 운명의 열쇠를 맡기는 꼴 사나운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지도자의 모습이 처연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자주적이고 반듯한 리더십을 만날까요?
주님, 강대강 구조에 살던 유다의 미래가 암담하듯 오늘 열강들의 질서에서 살길을 모색하는 외교 노선이 위태롭습니다. 주님의 뜻을 역행하는 길을 가지 않도록 저희를 다스려주십시오.
2024. 7. 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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