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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6 추천 수 0 2024.08.18 21: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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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3:1-1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8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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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fz92myub638 

성경본문 : 마태복음 23:1-12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창조절 10주, 2023년 11월 5일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절인 마 23:12절은 성경만이 아니라 다른 문헌에서도 흔히 들을만한 내용입니다. 동서양 스승들이나, 웬만한 윤리 교사들에게도 들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충고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지리라

 

잘난척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자기를 높이고 교만하면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인정받는다고 말입니다.

 

위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중에 나왔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2절부터 나오는 그들의 문제점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지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려고 성구 넣는 각을 만들어 이마나 팔에 달고 다니며 옷 술을 길게 늘어뜨립니다. 잔치에 가면 상석에 앉고 회당에 가면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문안 인사를 받는 일과 랍비라는 칭호 듣기를 좋아합니다. ‘잘 나가는’ 인생입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따끔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위선자라는 거지요.

 

이런 지도층 인사라 하더라도 잘난척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 수 있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 그들을 모두 위선자라고 일반화하면 곤란하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 공산당의 계급투쟁 이데올로기처럼 사람을 계층으로 분류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이상하게도 사람은 높은 지위에 오르면 자기도 모르게 대접받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거꾸로 대접받지 못하면 불편해지기까지 합니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나름 인격적이었고, 자기 성찰에서도 게으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나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높이는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있어 보이려고’ 꽤 애를 쓴 겁니다. 이게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삶의 태도가 왜 문제라는 걸까요? 오늘날 성공신화나 인정욕구가 우리 영혼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예수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은 결국 실현될 수 없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끝까지 올라가서 더는 올라갈 데가 없다고 합시다. 대통령이나 세계 최고 부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더 높이려고 온갖 방법을 찾다가 낙심하거나 늙어 죽습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제국의 황제들이 그런 길을 갔는지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런 황제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그런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정치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기업 세계에서도 그렇고, 조폭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제가 군목으로 활동할 때 그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장교 부인들의 모임에서 남편 계급에 따라서 권력이 형성된다고 말입니다. 사람은 모두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데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봐도 됩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에 얽힌 사태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8절에서 ‘랍비’라는 칭호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생은 하나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9절에서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는 지도자라는 칭호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도자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사회 지도층이 되어도 사람들을 지도할만한 능력이 실제로는 없습니다. 판사들도 재판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목사가 아무리 설교를 열심히 해도 일반 신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신자 중간쯤에서 신자들을 지도한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그것을 은근히 즐긴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버지나 어머니 역할을 하지만 그걸 감당할만한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모의 권위에 안주하고, 그걸 즐기려고 한다면 생명 충만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능력 밖의 일을 자랑하려니 인생이 초라해지는 겁니다. 본문은 이를 ‘낮아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화와 복

 

오늘 설교 본문 바로 뒤로 이어지는 단락에 일곱 번에 걸쳐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하고 노골적인 비판입니다. 마 23:13절에 나오는 첫 문장만 읽어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런 형식의 문장이 일곱 번이나 반복된 다음 33절에서는 급기야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렇게 과격한 표현은 복음서에서 이 대목이 유일합니다.

 

화가 있으리라는 표현과 대비되는 표현이 마 5:1-12절에 나옵니다. 소위 ‘팔복’으로 일컬어지는 대목입니다. 첫 번째 복은 이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 문장은 그리스어 ‘마카리오이’(Μακ?ριοι)로 시작합니다. 마 23장에 나오는 ‘화 있을진저’(Ο?α?)와 운을 맞추면 ‘복 있을진저 심령이 가난한 자여’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화가 임할 자는 자기를 높이는 부자이고, 복이 임할 자는 자기를 낮추는 가난한 자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삶에서 화를 당할 것이며, 자기를 낮추는 자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화를 면치 못할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아무리 낮은 자리로 내려와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전자에 속한 사람은 화가 삶의 내용이라서 삶이 초라해질 것이며, 후자에 속한 사람은 복이 삶의 내용이라서 삶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전자의 사람은 하늘나라(바실레이아 톤 우리논)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까지 못 들어가게 하나, 후자의 사람은 천국(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 속하게 됩니다. 이런 삶의 내용과 능력은 밖으로 확 드러나는 게 아니라서 사람들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살아있는 동안 편안히 ‘잘 먹고 잘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전혀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닌데도 그렇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사기꾼도 스스로는 잘 먹고 잘산다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높이는 게 아니라 ‘팔복’에 거론된 사람들이나 예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향해서 ‘당신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한 세리들과 창녀들처럼 자기를 낮출 수 있을까요? 거친 표현으로,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서 힘을 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자기를 낮춤으로써 높아질 수 있을까요? 이게 배워서 되는 게 아닙니다. 교양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처세술 문제도 아닙니다. 심리적인 힐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대목으로만 본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수 위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일종의 엘리트 조기교육을 받았고, 다른 이들의 존경심을 유발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되었으며, 세상을 실제로 바꿀만한 능력도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좋은 모든 조건을 손에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조건과 업적이 쌓일수록 그들은 점점 더 자기를 높이는 방식의 삶에 길들어갔습니다. 그게 그 사람들에게는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눈에는 위선이었습니다. 위선은 결국 화를 불러옵니다.

 

하나님 경험의 절대성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고상한 사람들도 자기를 높이는 방식의 삶에 길들었다면, 평범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하는 질문이 한 가지이고, 낮은 자리의 삶이 말만 그럴듯하지 실제로는 피곤한 인생이 아니냐, 하는 질문이 다른 한 가지입니다. 저는 이 질문을 나눠서 각각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 궁극적인 사실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 한 가지 궁극적인 사실이 분명해지면 다른 것들은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그 한 가지 궁극적인 사실은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 경험이 있어야 자기를 낮출 수 있고, 낮은 자리에서도 삶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구약에서 한 사람, 신약에서 한 사람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는 천사들의 합창 소리와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 뒤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유대의 종교 엘리트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뒤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 25a) 절대적인 존재를 만나면 자기를 높일 수가 없습니다. 토끼가 호랑이를 만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융자도 갚아야 하고, 다른 집 아이들 못지않게 우리 집 아이들도 엘리트 코스를 걷게 해야 하고, 부부 사이의 갈등을 푸는 일로 바쁘니까요. 도대체 절대적인 힘이 뭔데, 하나님의 영광이 뭔데, 내가 왜 죄인이고 비참한 사람인데, 하면서 성경의 하나님 경험 이야기를 삶의 현실로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만이 현실로 느껴집니다. 다시 묻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경험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현실 말고 더 절대적인 현실이 있을까요, 그런 경험은 세상살이에서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공허한 종교 놀음 아닌가요? 현대 지성인들이 종교에, 특히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긴 합니다. 다만 어떤 범주 안에 갇혀서 다른 세계를 전혀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성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가리킵니다. 초월성을 성경 표현으로 바꾸면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 55:8-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를 양자역학 개념으로 바꾸면 ‘불확정성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일상에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건은 그야말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인간 출생 자체도 신비롭지만, 구체적인 한 실존으로서의 인간 출생은 더더욱 신비롭습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는 일도 우연한 것이고, 만나서 결혼하는 일도 우연합니다. 우리나라가 80년 가까이 분단 상태로 지내리라는 것을 해방 직후에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지금 팔레스타인 가지 지구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도 사실은 우연한 계기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도 그렇고, 미움도 그렇고, 우리의 운명과 세상일은 우리의 예상을 늘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에 초월적인 힘이 개입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초월적인 능력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초월적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며, 종말에 완성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생명 충만

 

이 문제를 우리의 소소한 일상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유명 브랜드 백화점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최저임금만 받습니다. 하루 여덟 시간 일하고 가끔 특근도 합니다. 평균 월 2백만 원을 받습니다. 남편과는 이혼하고, 딸 하나 데리고 삽니다. 백화점 사장은 재벌급 여자입니다. 한국에서 1% 상류층에 속합니다. 두 사람의 운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백이면 백 모두 여사장을 선택하겠지요. 그런데 행복은 그런 식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자는 자기의 일 자체를 소명으로 여깁니다. 계산대 앞에 오는 손님들을 천사로 대합니다. 여사장은 사업을 어떻게 더 확장할지만 생각합니다. 누가 더 행복하겠어요? 어느 쪽 삶을 선택하겠어요? 제가 너무 꾸며낸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모두 이런 상황에서 살아갑니다. 자기의 삶에 개입하는 절대적인 생명의 힘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자기를 높이는 일에만 매몰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생명의 힘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의 위치가 아무리 낮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최소한 일용할 양식만 있다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 외에 더 생명 충만한 삶이 어디 있을까요?

 

앞에서 ‘마카리오이’라는 단어를 말씀드렸습니다. ‘복이 있으리라.’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조금 더 따라가면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야 높일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세상에 기대지 않고 하나님만 기대서 삽니다. 낮은 자리에 있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에, 생명의 근원에 가까이 가는 겁니다. 먹는 일과 숨 쉬는 일과 냄새 맡는 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낮은 데서 자세히, 그리고 오래 봐야만 눈에 들어오는, 정말 소중한 것들이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 그래서 더는 밑으로 내려갈 곳이 없는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모두가 피하는 자리이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자리이고, 모두가 꺼림칙하게 여기는 자리입니다. 그런데요. 놀라지 마십시오. 그 십자가에 달린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거기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빛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실제로 믿어지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낮은 자리에 내려갈까 하여 근심 걱정이 크십니까? 여러분이 자녀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할까 해서 염려되시나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봤자 별거 없습니다. 짐만 늘어납니다. 어쩔 수 없이 위선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미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낮은 자리에 내려간 사람처럼 살아야겠지요. 지금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아야겠지요.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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