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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2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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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82766 |
설교보기 : https://youtu.be/Z5d-2e_q5Fs
성경본문 : 시편 123:1-4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123:1-4, 창조절 12주(추수감사절), 2023년 11월19일
시편 123편은 4절에 불과합니다. 짧은 시편이지만 그 내용으로 본다면 전체 시편 영성을 압축적으로 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한 구절씩 차례대로 짚으면서 시 해설을 하듯이 설명하겠습니다.
1)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이 시인은 하늘에 있는 분을 향해서 눈을 든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은 신비로운 곳이었습니다. 하늘에서 햇빛이 쏟아지고 비가 내립니다. 우레와 번개도 칩니다. 별이 가득하고 구름이 드리우고 노을이 집니다.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늘은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곳이라는 말이 됩니다. 오늘 시인은 전통 신앙에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늘이라는 공간 자체가 아니라 생명의 궁극적인 원천에 관한 생각입니다. 생명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창조주의 능력으로 시작되었고 진행되는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그런 창조주가 계시는 곳이 고대인들에게 하늘이었습니다. 물리학과 생물학을 공부한 사람 중에서 일부는 ‘하늘에 계시는 주’라는 표현을 우스꽝스럽게 여깁니다. 그들은 자연과학적인 사실만이 진리이고 시나 철학이나 신학은 진리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한 분과에 불과한 자연과학에만 과몰입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를 향해서 눈을 든다는 말은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에 영혼의 촉수를 맞추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려면 우리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생명 현상이 얼마나 절묘하고 심층적인지를 느끼고 알아야 합니다. 이를 성경은 이미 인간 창조 사건에서부터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7)라는 말은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살리는 밥만 먹고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이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보라.’(마 4:3)라는 마귀의 요구를 듣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 8:3)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가장 깊은 차원인 영혼의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는 그 영혼의 깊이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말하는 하늘은 곧 영혼의 깊이입니다. 그 하늘에 계시는 분이 우리 영혼에 힘을 공급해주시기에 그분을 향해서 눈을 높이 들겠다는 겁니다. 저도 이 시인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눈을 들고 싶습니다. 그분께 지금보다 더 집중해서 살고 싶습니다. 영혼의 깊이 안으로 더 들어가고 싶습니다. ‘영혼의 깊이’가 뭔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할 분들이 계신가요? 설교를 끝까지 들으면 손에 잡힐 겁니다.
2) 이 시인은 하늘에 계신 분을 향해서 눈을 든다는 사실을 2절에서 문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 시인의 거룩한 갈망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고대사회에서는 하인, 또는 종이라는 계급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근본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돈이 상전이고 인간은 종입니다. 종들은 상전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예민하게 살펴야만 했습니다. 한눈을 팔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절박한 겁니다. 시인은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영혼의 깊이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절박하고 간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으나 밤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부모를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기다림의 영성이 자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인 생명의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올해는 12월3일이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교회력은 대림절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예수 재림을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그 재림은 생명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그런 재림 신앙이 어떤 이들에게는 조롱의 대상으로 비칩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사회에 자리를 잡을 때 로마 지성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재림 신앙을 유치하고 허망하다고 여겼습니다. 현대인들도 비슷하게 생각할 겁니다. 일반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스스로 재림 신앙을 별로 진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상관없이 삽니다. 절대적인 생명의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의 간절함이 없습니다. 오면 좋고, 오지 않아도 좋은 듯이 삽니다.
이런 사태를 실감하려면 죽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죽음을 향해서 가는지, 죽음이 우리를 향해서 오는지 모르겠으나 그 순간을 우리가 기다린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도 상관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삽니다. 너무 많은 걸 소유하려고 하고, 너무 많이 경쟁하고, 너무 많은 것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제가 지금 도덕적인 훈계를 늘어놓으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 우리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대상을 기다리면서 사는지, 하고 질문하는 겁니다. 비유적으로 일주일 후에 한반도에 진도 10에 해당하는 지진이 일어나는 게 확실하다고 가정해봅시다. 우리는 무엇해야 할까요? 자기를 모욕한 사람을 찾아가서 욕을 바가지로 쏟아낼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른 일 제쳐놓고 지진을 견뎌낼 준비에만 몰두하겠지요. 우리는 인생 전체를 통해서 실제로 무엇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그런 기다림이 있기나 한 걸까요?
3) 시인의 기다림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3절에서 강조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우리말 성경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한네누’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한 단어인데 영어로는 네 단어입니다. ‘Have mercy on us.’ 3절 전반부를 히브리어 문장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한네누 야웨 한네누’ 이를 우리말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말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뜻입니다. 은혜, 자비, 불쌍히 여김은 같은 뜻입니다.
일단 여러분은 이런 표현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할 겁니다. 신세 한탄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릅니다. 오죽 자신감이 없으면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냐, 너무 구질구질하다, 거지 근성 아냐, 하고 속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감 넘치게 사는 걸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감과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가진 게 많고 이룬 게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니까 이만하면 내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지, 하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당당하게 살고 싶은 현대인의 눈에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저 시인의 기도 ‘한네누 야웨 한네누’는 구차하게 들립니다. 정말 그런가요?
저는 이 시인이 부럽습니다. 그는 두 가지 명백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일일이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시대정신이 인간의 영혼을 실제로 풍요롭게 하는지만 짚으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또는 어떤 방식으로 기쁨과 평화와 안식과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무엇인가요?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온갖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래서 고독과 늙음과 소멸까지도 가벼워지는 그 재미가 무엇인가요? 손으로 꼽아보십시오. 돈벌이, 산악회 활동, 주식이나 부동산 사업, 텃밭 가꾸기, 자식 돌봐주기, 국내외 여행, 유튜브 보기, 독서, 정치 활동 등등, 제가 다 알지 못할 정도로 많은 활동이 있을 겁니다. 재미있어 봐야 얼마나 재미있나요? 재미있다고 여기는 활동 자체에서 많은 문제가 벌어집니다. 자기 뜻대로 진행되면 기분이 좋으나 잘 안 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거기서 느끼는 재미 역시 본질에서 일시적입니다. 인터넷 게임의 짜릿한 재미도 언젠가는 지루하게 느껴질 겁니다. 사람은 그런 일들로 영혼의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더 과몰입하고 더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겁니다.
이런 일상에서 느끼는 재미를 다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지내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질문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도 문제는 또 벌어집니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동료 수도사들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일상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그 한계를 미리 뚫어보시라는 겁니다. 그래야만 영혼의 만족을 갈망할 수 있습니다. 그 영혼의 만족은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영혼의 만족이 있어야만 일상의 그 자잘한 일들까지 빛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그런 심정으로 ‘한네누 야웨 한네누’라고 기도한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또는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촉매입니다. 자비를 더 익숙한 용어로 바꾸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창조주이신 분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의 영혼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풍성해집니다. 이걸 믿기 힘든가요? 이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직장에서 상급자가 작업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하급자를 책망했습니다. 모욕적으로 들릴만한 언사도 쏟아냈습니다. 모욕당한 사람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런데 이 하급 직원이 사장의 아들이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사람은 사장과 특별 관계이기에 책망과 모욕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특별 관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특별 관계가 곧 생명 충만입니다. 다시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야겠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복권 100억 원에 당첨되었습니다. 이전에 1천만 원 사기당한 일을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자비를 이렇게 절대적인 사건으로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인의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4) 시인이 이렇게 ‘한네누’(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간절히 원한 이유는 주변 사람들의 멸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무슨 이유로 멸시를 당했는지는 본문으로 알 수 없습니다. 가난하기에 멸시당했을까요? 무식하기 때문이었을까요? 신앙생활 자체를 부정당한 것일까요? 4절에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두 종류의 사람이 언급됩니다. 안일한 자는 인생이 잘 풀려서 자부심이 큰 사람이고, 교만한 자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 주류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에서 오가는 말들이 조소와 멸시와 야유와 냉소와 비아냥과 증오로 얼룩져 있습니다. 말썽꾸러기 초등학생들보다 더 유치한 방식으로 말 폭탄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 때문일까요? 우리 정치가 언제부터 이렇게 상대를 헐뜯는 수준으로 떨어진 것일까요? 시인은 이런 이들의 조소와 멸시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갈망합니다. 그것만이 그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후반부를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는 사람들, 멸시하는 사람들, 조소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기고 무시합니다.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삶의 범주에 그들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쌓은 인생 업적, 정치 권력과 재물에 휘둘리지 않으니, 기분 나쁘겠지요. 그래서 조소하고 멸시하는 겁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작동합니다. 이를 거스르면 크고 작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 어려움이 두려우니까 어쩔 수 없이 거기에 편승하는 겁니다. 자부심이 큰 사람과 고위직 인사들은 어깨에 힘을 더 주게 됩니다. 악순환입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려면 한쪽이라도 일단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그래, 당신들은 잘난 맛에 살아라, 나는 못났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살겠다.’ 하는 겁니다. ‘당신들은 직원을 많이 거느린 씨이오로 살아라. 나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햇살과 비와 구름과 바람을 친구로 삼아 살겠다.’ 이게 말이 안 되나요? 정신 승리에 불과한가요?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 교회 온, 오프 교인 중에 전업 농부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모두 전업 농부 못지않습니다. 모든 먹을거리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자비로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지구를 제외하고 태양계 안에 있는 그 어떤 행성에도 벼와 밀과 포도와 사과와 배추는 자라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연생태계를 훼손하는 가운데서도 지구에는 아직 각종 먹을거리가 충분하게 생산됩니다. 햇빛의 양이 10%만 준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지구 평균 기온이 5도만 올라가도 역시 지구는 현재 인간이 먹고살 만한 식량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쌀 한 톨, 고구마 한 개, 배추 한 포기는 모두 기적의 산물입니다. 이런 먹을거리 앞에서 우리는 황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황홀함이 간절해지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시인처럼 ‘한네누 야웨 한네누’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게 곧 구원 경험입니다.
눅 17장에는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평소에 격리되었다가 마침 마을 근처에 왔다가 예수님을 발견하고 먼발치서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7:13) 영어 성경은 ‘Jesus, Master, have mercy on us.’라고 번역했습니다. 위 시편 123:3절 문장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비와 은혜의 근원이십니다. 자, 우리 함께 2천 년 전 저 문둥병자의 심정으로, 더 나아가서 2천5백 년 전 오늘 본문의 시편을 노래했던 고대 유대인들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기도해봅시다. ‘한네누 야웨 한네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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