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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1:1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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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83143 |
설교보기 : https://youtu.be/bfyyHdz32Mg
성경본문 : 에베소서 1:15-23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창조절 13주, 2023년 11월 26일
에클레시아
신약성경 <에베소서>는 튀르키예 중서부 지중해에 면한 도시 에베소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요즘 이름으로는 에페소스입니다. 당시에 에베소는 지중해를 오가는 무역선이 모여드는 항구 도시입니다.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있는 아데미 신전으로도 유명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를 마치면서 에베소에 잠시 들렸다가(행 18:19-20) 3차 전도여행 때는 2년 이상 머물렀습니다. 그 이야기가 행 19:1-41절까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울은 타의에 의해서 에베소를 떠나서 마게도냐로 갑니다. 훗날 바울은 감옥에서(엡 3:1)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여러 교회에 회람 형식으로 보낸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둘 등장합니다. 첫 단어는 교회입니다. 엡 1:22-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로 번역된 본문의 그리스어는 에클레시아(?κκλη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church로 번역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교회라는 뜻의 독일어 Kirche(키르헤)가 아니라 공동체라는 뜻의 Gemeinde(게마인데)로 번역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복음서에 아주 드물게(마 16:18, 18:17) 나옵니다. 당연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교회가 없었으니까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교회의 초기 상황을 역사적으로 서술하는 사도행전에 주로 나옵니다. 그런데 에클레시아는 원래 교회 용어가 아니라 정치계의 용어였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이는 ‘민회’를 가리켜서 에클레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 흔적이 바울의 에베소 활동을 다루는 행 19:39절에 나옵니다. 바울이 에베소 민중들에 의해서 일종의 인민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치안을 맡은 서기장이 거의 민란을 일으킬지 모를 정도로 흥분한 민중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진정시킵니다. 당신들이 비난하는 바울 일행이 신전의 물건을 훔치거나 실정법을 어긴 일이 없으니, 이렇게 과격한 시위 방식으로 하지 말고 정식으로 고소해서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말입니다. 3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이 대목에서 민회로 번역된 그리스어가 바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꽃이 바로 에클레시아였습니다. 교회는 왜 정치적인 용어인 에클레시아를 받아들인 것일까요? 자신들을 정치 집단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의 유대교는 기본적으로 회당종교입니다. 유대와 갈릴리 지역 여러 곳에 회당(시나고그)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도하던 지역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회당을 세웠습니다. 회당이 유대인 공동체에서 구심점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대다수가 회당에 다녔습니다. 자신들의 모임에 회당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구분하려면 ‘새로운 회당’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통적인 의미의 종교적인 용어인 시나고그를 배척하고 오히려 정치 집단으로 오해받을만한 용어인 에클레시아를 선택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이유 중의 하나가 에클레시아라는 이름에 있었을까요? 그건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이런 1세기 전통을 이어받는다면 ‘교회’라는 이름보다는 ‘공동체’라는 이름이 더 바람직합니다.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회당이라는 건물이 아니라 민회, 즉 구성원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시대부터 이미 교회는 건물 중심의 회당 개념에서 벗어나서 공동체의 ‘모임’(에클레시아)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한국교회는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교회당이라는 건물에 과몰입합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에너지는 교회당 건축에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걸 신앙의 척도로 삼습니다. 무리해서라도 멋진 교회당을 건축하면 교회가 부흥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당을 성전이라고도 말합니다. 신약시대에 성전이라는 말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모이려면 교회당이라는 건물이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교회당은 도구입니다.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시작이 모임 자체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였다는 사실에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플레로마
바울은 그 본질을 가리켜서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단어인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무엇일까요? 충만(πλ?ρωμα)은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충만을 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양적인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교회에 신자들도 많이 모이고 열정적으로 기도드리고 선교도 많이 하고 세상에서 칭찬도 많이 들어야 충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유럽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배에 오는 이들이 적고, 예배 분위기도 뜨겁지 않다고 말입니다. 교회당이 술집으로 팔린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유럽 교회에 영적 다이내믹이 약화하는 건 분명하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생각하다가는 교회의 본질을 놓칩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인구밀도가 아주 높은 서울이 생명 충만한 곳인지, 인구밀도가 낮은 지방이 생명 충만한 곳인지 말입니다. 물론 농어촌 소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서울 집중화 현상은 심각합니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겁니다. 시골에 서울처럼 사람이나 카페나 연봉 높은 일자리나 자동차나 매연은 많지 않아도 나무는 많고 새도 많고 흙도 많고 곤충도 많습니다. 어디가 더 생명 충만한 곳인가요? 충만하다는 말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듯이 그분의 충만하심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볼 눈을 가진 사람만 볼 수 있고, 느낄 줄 아는 사람만 느낍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전에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해로 여기고 …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다.’(빌 3:7,8)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과감하게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영적인 충만함을 느끼고 있나요? 그래서 큰 교회당 건물이 없어도 전혀 외롭지 않게, 주눅 들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대답하기 전에 먼저 충만함(플레로마)이 무엇인지를 조금 저 생각해봅시다. 충만함은 결핍의 반대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나 작곡가가 작곡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이들은 저절로 충만하게 삽니다. 소꿉놀이도 그들에게는 충만함입니다. 어른이 되면 충만하게 살기가 어렵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온갖 인간관계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겠지요. 그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이기에 세상의 것만으로 충만함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게 근본 문제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그림 그리기나 작곡, 각종 취미활동도 잠시만 우리를 어떤 예술 정신에 사로잡히게 할 뿐이지 일상으로 돌아오면 결핍감에 떨어집니다. 그게 병적으로 나타나면 우울증에 걸리겠지요. 형편이 아무리 좋아져도 현대인들이 별로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은 하나님이 세상과 다르듯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충만감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은 세상의 것들이 아무리 부족해도 우리를 결핍감에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시편 기자가(시 42:1)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충만하심 안으로 들어가려면 당연히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 경험’이 충만하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경험하려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17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성경에 반복해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그냥 아는 것과 실제 깨우치는 거와는 다릅니다. 사과를 직접 먹어보기 전에는 아무리 말로 그 설명을 들어도 사과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바울이 17절에서 ‘알게 하시고’라고 했고, 19절에서도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느낄 수 없다는 뜻입니다. 17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이어지는 18절에서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하나님의 능력과 그 충만하심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연관해서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어떤 이들에게는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 겁니다. 세상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 없이 존재하는 듯이 보이니까요. 우리가 경험하는 멋진 세상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군림하는 듯이 보이니까요.
새로운 차원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세상과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물리학에서 일종의 양자역학과 같습니다. 기계적 역학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양자역학을 받아들지 못하듯이 세속 통치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 통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통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셨다는 말도 허황한 말로 들립니다.
새로운 차원이 무엇일까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죄는 자기 연민이며 자기 집중이고,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유혹에 기울어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죄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은 죄로 파멸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야만 생명을 얻습니다. 죄와 생명이라는 관점으로 세상과 인간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문제는 돈이나 지식이나 외모나 권력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온갖 재미있는 일을 다 하고,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면서 살아도 사람의 죄가 해결되는 게 전혀 아닙니다. 늘 자기가 중심이 되려고 하고, 잘난척하려고 하고, 더 나아가서 다른 이를 지배하려고 하고, 그러다가 유무형의 폭력 사태로까지 발전하고,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속상해합니다. 자아의 포로로 사는 겁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다 그런 건데 그걸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지, 하고 반문할 겁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게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더구나 적자생존이라거나 자연도태 등등, 진화생물학의 몇 가지 원리에 근거해서 자기를 과시하려는 욕망을 당연시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행복하다면, 그리고 사람이 단순히 짐승이라면 계속 그렇게 살면 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짐승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현대의 진화생물학보다 더 상위의 진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면 사람은 생명 충만을 경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여기서 모든 게 무너집니다. 행복도 무너집니다.
만약 성경이 말하는 죄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세상의 모든 세력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세상의 그 어떤 권력에도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삶의 관점과 차원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고,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을 자기 힘으로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압박감에서 벗어났으니까 당연히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이건 아주 명백한 문제입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아도 괜찮기에 공연한 일에 삶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삶에 충실하면 됩니다. 누구에게 잘 보일 것도 없고, 누구를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충분한 것을 받은 사람이기에 그걸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삶에 대해서 성찰하는 사람이라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정도는 다 생각합니다. 최대한 겸손하게 살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만족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덕스럽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교양과 인격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렇게 사는 겁니다. 본문 20절이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자기 중심성인 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안 될까요, 될까요? 관념에 불과한가요, 생명의 리얼리티인가요?
앞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질문했습니다. 대답을 찾으셨는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집착에서, 그리고 심리학에서 말하는 ‘에고’에서 해방되었다면, 이게 죄로부터의 해방인데, 만물로부터 해방된 겁니다. 바울은 이런 삶의 경지에 들어갔기에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본다면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가, 하는 것을 삶의 화두로 삼게 되겠지요. 이런 화두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곧 에클레시아입니다. 영혼이, 즉 내면의 세계가 충만한 사람들 곁에 서로 머물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서 충만함을 더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 에클레시아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실제의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교회는 종종 위기에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으로 얼룩지기도 합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게 교회의 곤혹스러운 실존입니다. 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라는 바울의 진술은 이런 실존 앞에서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권고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생명 사건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라는 말은 개별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그것과는 거리를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충만하심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도 하고, 관심이 없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충만하심 안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깊이 들어가고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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