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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61:1-4, 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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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84005 |
설교보기 : https://youtu.be/png9gkUb58Q
성경본문 : 이사야 61:1-4, 8-11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61:1-4, 8-11, 대림절 3주, 2023년 12월 17일
이사야의 소명
저는 구약 선지자들의 설교를 읽을 때마다 그 강력한 메시지에 놀라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합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다루는 모세오경이나 역사를 다루는 전기 예언서, 또는 그들의 신앙을 문학적으로 다루는 시편이나 전도서 말씀도 은혜롭기는 하나, 선지자들의 설교인 후기 예언서 말씀이 더 강렬하게 들리는 이유는 각각 선지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이사야 61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 61:1, 2절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바벨론 포로기 어간에 실제로 활동했던 한 선지자의 설교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고,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셨다.’라는 말은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 경험을 가리킵니다. 이는 거꾸로 소명이 없으면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로서의 사명을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짚었습니다. 1)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2)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3)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4)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5)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거론된 이들은 삶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문장 전체 구조에서 보면 첫 번째로 거론한 가난한 자와 마지막으로 거론한 슬픈 자가 이들을 대표합니다. 마음 상한 자와 포로 된 자와 갇힌 자는 모두 가난한 자와 슬픈 자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렇습니다. 가난과 슬픔은 우리 삶을 여러 모양으로 파괴합니다. 인간의 품격을 빼앗습니다. 삶을 파괴하고 인간의 품격을 빼앗는 일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고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가난한 자가 자기 삶의 용기를 잃지 있도록 기쁜 소식을 전하고, 슬픈 자가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위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설교는 허공이 아니라 지금 제가 설교하듯이 구체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 사람들은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유대인들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기원전 587년에 발생한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유수 이후 50년 정도의 세월을 견딘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성전 제사도 드리지 못했으며, 모든 종교적 전통도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지도층 인사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이방 문명권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에게 온갖 수모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시편 137편은 그 상황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1-3) 바벨론 사람들이 흥밋거리로 예루살렘 전통 노래를 부르라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요구한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은 하나님 신앙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신앙을 아예 포기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지켜주지 못한 무능력한 존재이거나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유수 때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사야가 말하는 가난한 자이고 슬픈 자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이고 포로 된 자이고 갇힌 자입니다.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와 슬픈 자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가난은 성실하게 살지 않은 탓이 크니까 지금부터라도 더 노력해서 가난에서 벗어나거나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금 자본주의는 우리를 계속해서 그렇게 살라고 다그칩니다. 더 일하라고, 더 노력하라고, 남에게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말라고,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승리해야 한다고, 수능 1점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말입니다. 가난 문제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되기도 하나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기도 합니다. 이사야 설교의 배경인 바벨론 유수와 그 직후 상황은 어떻게 해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한반도가 해방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것처럼, 그리고 장애인으로 태어나거나 나중에 장애인이 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사야가 가난한 자에게 전하겠다는 좋은 소식은 무엇인가요? 대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가난으로 인해서 인간다운 삶의 품위가 손상되지 않는 세상이 온다는 소식이 그것입니다. 삶의 품위도 객관적인 지표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연봉 1억 원으로도 삶의 품위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3천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질적인 문제는 사회에 내재한 상대적인 박탈감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은 이런 상대적인 박탈감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서울에 소재한 명문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젊었을 때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장만하지 못하면 인생 ‘망쪼’라는 생각도 합니다. 복된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사니까 늘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남녀가 사랑하겠으며 결혼하겠으며 아이를 낳겠습니까.
본문이 말하는 ‘가난한 자’는 우리말 성경 각주에서 보듯이 ‘겸비한 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KJV은 ?????????(아나윔)이라는 히브리어를 meek(온순한 사람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온순합니다. 그렇지 않은 예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세계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부자 나라 사람들을 비교해보십시오. 우리나라 사람이 온순한지 네팔 사람이 온순한지 비교해보십시오. 가난한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없어서 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은 온순한 성품으로도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온다는 소식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혀 다릅니다. 착하면 안 되지, 손해 보면 안 되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 몫을 챙겨야지, 하는 주장이 대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온순한 사람은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슬픈 자에게 위로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슬픈 자는 단순히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게 아닙니다. KJV은 mourn(애도하다)로 번역했습니다. 자기 신세를 슬퍼할 수도 있으나 근본에는 옳지 못한 세력에 의해서 벌어지는 불행에 대한 애도이고 분노이며 연대입니다. 마 5장에 나오는 ‘팔복’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해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등등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슬픔과 타자를 향한 연민으로 가득합니다. 이사야가 말씀을 선포하던 당시 유대인들의 영혼이 바로 그랬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살던 유대인 중의 일부가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으나 그곳에서의 현실 역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은 50년 동안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a절에 묘사되었듯이 그들은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이사야는 영혼이 슬픈 이들을 어떻게 위로한다는 것일까요?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고 했습니다. 은혜롭다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소운)은 ‘받아들여질 수 있다.’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KJV은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바로 은혜로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은혜의 해는 구약의 안식년과 희년 전통에 속합니다. 안식년은 7년마다 돌아오는 해이고, 희년은 7년이 7번 지나간 다음 해를 가리킵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오면 모든 왜곡된 질서가 본래의 질서로 회복됩니다. 종으로 팔린 사람이 종에서 풀려납니다. 흉년에 판 땅이 다시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안식년과 희년은 안식일 전통에 뿌리를 둡니다. 안식일은 일상을 멈추고 하나님의 창조와 출애굽을 찬양하는 날입니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 전통은 인간에 의해서 무너졌던 정의와 평화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근본에 담고 있습니다. 인간다움이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는 매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경험하는 때이며,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때입니다. 이런 예언자적 상상력 없이 거칠고 비루하며 슬프기 짝이 없는 이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말에 따르면 은혜의 해는 동시에 ‘보복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다니, 표현이 너무 거칠게 들립니다. 시편에도 원수를 갚아달라는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원수를 갚는 건 아닙니다.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은혜의 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때라면, 보복의 날은 하나님께 거부당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악행을 자행하는 자들을 거부함으로써 보복하신다는 뜻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여기서 여호와께서 영원한 언약을 맺는 대상은 가난한 자이며 슬퍼하는 자입니다. 불의에 의해서 강탈당하는 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강탈하는 자를 일일이 상대해서 혼내시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러기를 바라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자들을 더 사랑하는 방식으로 불의의 강탈을 제어하십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동네 아이에게 얻어맞았습니다. 때린 아이를 찾아가서 시시비비를 따지고 다시는 그렇게 못하도록 다짐을 받는 방법이 있겠지요.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자기 아이를 더 진실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겁니다. 이런 사랑을 경험한 아이라면 얻어맞은 것도 내면에서 극복할 뿐 아니라 앞으로 자라면서 자기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는 방법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자기의 백성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므로 그 백성들이 두려움 없이 고난을 대면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외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이야말로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고(Laudate Dominum)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설교의 성취
누가복음 4:16절 이하에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선지자의 설교가 인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고향 나사렛에 들렀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회당에서 예수께서는 성경을 읽으시고 설교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랍비로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 읽으신 성경이 바로 사 61:1절 이하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읽으신 다음에 예수께서는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조금 더 이어지자 고향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냥 추방하는 정도가 아니라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사이비였습니다. 그런 사이비와 엮이는 건 신상에 해롭습니다. 발걸음 못하게 쫓아내야겠지요.
그들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닙니다. 은혜와 해와 보복의 날,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설교는 고대 유대 역사에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당시는 상황이 더 나빴습니다. 로마가 파송한 총독은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을 완벽하게 통제했습니다. 바벨론 유수 시대 못지않았습니다. 약간만 저항의 조짐이 있으면 로마는 일벌백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이 그 본보기입니다. 예수 이전에도 십자가로 죽은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보이지 않는 그 상황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자기에서 성취되었다는 예수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망발도 이런 망발이 없었습니다.
나사렛 회당에 모인 고향 사람들만이 아니라 당시 유대교 고위 성직자들도 예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 말씀을 그들은 율법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 증거를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증거는 기적과 표적과 유대의 정치적인 독립이겠지요. 지금도 그런 요구에 묶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먹고 사는 문제로 고달픈데, 몸과 마음이 아픈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사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런 말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께 요구하던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은 인생살이에서 모든 일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풀리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 자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말씀을 경험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의 설교를 오해했으나 예수께서는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예수 말씀 중에서 한 가지만 예로 들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솔로몬이 누리는 모든 영광과 화려함도 들의 백합화만 같지 못하다.’(마 6:29)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솔로몬의 ‘럭셔리’한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정말 뼈저리게 실감한다면 공연한 것으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염려를 내려놓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무자비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를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분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보다 더 기쁘고 더 위로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니 대림절과 이어지는 성탄절 동안 각종 염려를 내려놓고 온전히 기뻐하며 즐거워하십시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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