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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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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84433 |
설교보기 : https://youtu.be/uTAxT0o4p7U
성경본문 : 누가복음 1:26-38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1:26-38, 대림절 4주, 2023년 12월 24일
우리 개신교회와 로마가톨릭 사이에서 마리아는 일종의 뜨거운 감자입니다. 개신교회는 마리아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나 로마가톨릭교회는 거의 여신급의 대우를 받습니다. 가톨릭교회에는 성모 승천 축일도 있고, 성모송(聖母誦) 형식의 기도문도 있습니다. 성당 마당에 성모상이 있고, 개별 신자들 집안에도 대개는 성모상이 있습니다. 마리아와 연관된 각종 신화가 그들의 신앙 현장에 자리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낳을 때만이 아니라 영원한 처녀였다고 주장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형제들은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 형제라고 둘러댑니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우리 눈에는 마리아를 거의 우상 숭배하듯이 섬기기는 하나, 가톨릭 신학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를 신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겁니다.
마리아에 관한 우리 개신교회의 생각은 어정쩡합니다. 예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마리아 자체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라는 관점이 지나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이 옳기는 하나 그 예수 그리스도가 공중에서 내려온 게 아니라 마리아라는 구체적인 여자의 몸을 통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육체성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우리 개신교회 신학과 신앙에는 이런 영지주의적인 위험성이 늘 숨어있습니다. 교부들은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배격했습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오늘 우리가 읽은 눅 1:26-39절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가서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알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위 ‘수태고지’ 사건입니다. 마리아를 방문하기 전에 가브리엘은 늙어서까지 아기가 없었던 제사장 사가랴를 찾아가서 함께 늙어가는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알린 천사입니다. 태어날 아들에게 붙일 요한이라는 이름까지 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여섯째 달이 지난 뒤에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당시는 조혼이 일반적이어서 마리아의 나이는 대략 15세 이전으로 추정됩니다. 30-31절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정말 당혹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만 했지 동거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대답은 성관계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35-37절에서 마리아의 비상한 임신에 대한 근거를 세 가지 논리로 제시합니다. 1)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이다. 2) 네 친족 엘리사벳도 가임기가 지났으나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3)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 출생을 세례 요한의 출생과 밀접하게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친족간이었습니다. 사촌이나 육촌일 수도 있겠지요. 엘리사벳의 임신도 특별했고, 마리아의 임신도 특별했습니다. 엘리사벳은 가임기가 지난 뒤에 임신했고, 마리아는 남자와의 성 관계없이 임신했다는 겁니다. 가끔 가임기가 지난 여성이 임신했다는 말은 지금도 듣습니다. 우연히 그 여자의 몸 안에 남아있던 난자가 활성화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자와의 관계없이 임신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시험관 아기라면 물론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마리아의 예수 임신이야말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제법 많습니다. 소위 동정녀 탄생 기적이라고 말입니다.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바울은 갈 4:4절에서 이와 상반되는 듯한 뉘앙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말입니다. 동정녀가 당시 교회 신앙에서 중요한 문제였다면 바울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하지 않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게 하시고’라고 표현했겠지요. 사도신경에는 ‘동정녀에게 나시고’라는 표현이 명시적으로 나옵니다. 더 정확하게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문장에서 핵심은 성령과 마리아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이고 마리아는 인간 여자의 몸이라는 뜻입니다.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에 따르면 이 문장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가리킵니다. 당시 사도신경을 고백하던 사람들에게 동정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자가 중요했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자를 언급한 이유는 앞에서 잠깐 짚었듯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처럼 똑같이 육체로 오셨고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부정한 영지주의를 배격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도 ‘남자를 알지 못한다.’라는 진술보다는 마리아라는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둬야 합니다.
인간 마리아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에는 마리아에 관한 특별한 전승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장면입니다. 요 19:25에 따르면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곁에 그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옆에 사랑하는 제자가 함께 있는 걸 보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제자에게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런 말씀을 마치고 예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 토로하셨고, 고통을 줄여주는 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다 이루었다.” 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기도로 바치는 ‘성모송’(聖母誦)은 다음과 같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마리아가 ‘여인 중에 복되시다.’라는 표현은 사실적인 게 아니라 역설적인 의미입니다. 자기 아들이 십자가로 처형되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한 어미의 심정은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합니다. ‘내 아들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로 죽는 거니까 감사한 일이지.’ 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말라고 매달리는 게 어미의 심정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 』의 첫 장면은 유대 독립을 위해서 반로마 무력투쟁에 나섰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남자의 어머니가 울부짖는 절규입니다. 그녀는 십자가를 만든 목수 예수를 저주합니다. 내 아들이 달려 죽을 십자가를 만든 당신도 내 아들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 거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목수로 살았던 건 분명하나 십자가 형틀을 만들었다는 건 소설가의 문학적 상상력입니다. 저는 이 소설에 나오는 이 여자의 절규가 예수 십자가 곁에 섰던 마리아에게서도 터져 나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눈앞에서 바라본 트라우마 때문에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평생 요한에게 얹혀서 살아야 했던 건 아닐까요? 그녀는 복된 여자인가요, 참척의 고통 가운데서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여자인가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가였는지를 절감하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시체를 마리아가 아기 다루듯이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은 형상입니다. 시체의 축 늘어진 모습은 실제를 보는 듯합니다. 예수 십자가 처형 당시 마리아의 나이는 단순히 계산해서 사십 대 후반입니다. 이 조각 작품에 나오는 마리아의 얼굴이 너무 젊다고 해서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마리아의 얼굴이 아니라 손을 보았습니다. 오른손은 늘어진 예수 시체의 어깨를 받칩니다. 왼손의 모양이 특이합니다. 죽은 예수의 몸을 받치거나 붙들지 않고 손바닥을 위로 향합입니다. 저는 그 왼손을 보고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하나님!’ 하고 속으로 탄식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습니다. 거의 넋을 놓은 심정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요. 그러니 어떻게 마리아를 ‘여인 중에 복되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죄 없는 자의 고통을 대표하듯이 마리아는 고통받는 어머니들을 대표하는 게 아닐는지요.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죽은 아이를 가슴에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들 말입니다.
저는 마리아가 어머니로서는 불행했을지 모르나 가톨릭교회의 ‘성모송’(Ave Maria)을 그분들과 함께 기도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녀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임신하고 출산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린 예수를 잘 돌보지 못해서 고대 사회에서 만연했던 유아 사망이 아기 예수에게서 일어났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만 알았을 테니까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임신과 출산은 인류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임신과 출산과 육아 문제는 단순히 ‘내 자식’을 얻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도 마리아의 자궁 안에서 열 달을 지냈고, 태어난 다음에 어머니 마리아의 젖을 먹고 그녀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예수 운명에서 마리아라는 여자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우리가 어떻게 마리아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한 여자로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그를 낳고 기른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기자는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이기도 하고, 신학적이라면 아주 신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를 전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인식의 한계와 믿음 사이에서
본문에 나오는 천사의 말은 어린 마리아가 이해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다윗의 왕위, 영원한 야곱의 집,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성령이 임하심,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 하나님의 아들 등등이 그렇습니다.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개념 용어입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는 불능한 일이 없다.’라는 마지막 말만은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마리아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오늘 우리 모두 이 두 가지 사실, 즉 인식의 한계와 믿음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세상과 인생을 우리가 다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 역사를 다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물리적인 사실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과학도 모든 것을 밝히지 못합니다. 과학은 세상의 원리에 대한 모형과 정리를 밝히는 것뿐입니다. 문제는 세계가 그런 모형과 정리 안에 다 담기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임시적인 겁니다. 왜 착한 사람이 지나칠 정도의 고통을 당하는지, 왜 뻔뻔한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지, 장애아로 태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연재해로 왜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감당하기 힘듭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는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지금도 고유한 방식으로 보존하시고, 그분의 때가 되면 완성하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미래가 이미 현재의 삶 안에 들어왔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으로 짙은 안개나 어둠 속과 같은 이 현실을 뚫고 나갑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은 미몽인가요? 광신인가요? 이런 삶 말고 더 가치가 있거나 확실하다고 여길 수 있는 삶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여전히 불안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하심이 실현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영적인 태도를 우리는 마리아의 고백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38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문장이 지난 2천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인 감동과 통찰을 주었을지요. 마리아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으로 낮추었습니다. 여종이 아니라 왕이나 공주가 되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은 이런 표현을 싫어할 겁니다. 칼 바르트는 오늘 본문에 이어서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를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천한 마리아를 바라보십시오. 가난한 교회를 바라보십시오. 여기서 찬양과 기쁨이 나올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비천한 마리아와 가난한 교회를 바라보시는 분을 쳐다보십시오. 그렇다면 찬양과 기쁨이 나오는 이유를 이해할 것입니다. … 주님은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심으로써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십니다.”(바르트와 매일묵상, 401쪽) 하나님은 공주와 여종의 신분에 차이를 두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대학교수와 청소부의 신분도 차이가 없습니다. 1만 명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와 50명 모이는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분명하다면 말입니다. 먹는 즐거움 자체를 느낄 줄 안다면 20만 원짜리 호텔 만찬이나 원당에서 파는 7천 원짜리 순두부 백반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단칸방에서도 행복합니다.
둘째, 마리아는 천사의 말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순종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이 예수의 순종으로 이루어졌는지 모릅니다.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는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원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못하면 실패한 인생으로 여깁니다. 도대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으며, 그렇게 했다고 해서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죽음을 여러분 ‘원대로’ 처리하고 싶으신가요? 마리아는 15살 어린 나이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사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여성이었기에 그의 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게 아니겠습니까. Ave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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