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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언자
열왕기하 4:1~17
한때 목회자가 미혼 여성들의 결혼 상대자 후보 순위 앞자리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의 아내가 걸어야 하는 봉사와 헌신의 길이 좋아서가 아니라 부요와 품위와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의 경제 번영이 이루어지는 시점과 맞물려 동네마다 교회가 들어섰고 신학교에는 학생들이 미어졌고 무인가 신학교도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던 시대였습니다. 사회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노래를 불렀고 교회는 축복이라는 장단으로 박자를 맞췄습니다.
목회자에게 청빈의 삶을 요구하는 일은 가혹합니다. 목회자가 사명을 따라 산다고는 하지만 생활인으로서 누려야 할 적정선은 있습니다. 한 교단의 <목회자 윤리강령> ‘경제생활’ 조항에 의하면 “목회자의 경제생활은 한 교회 안의 교인뿐만 아니라 동료 목회자, 그리고 사회의 일반인에게 상실감과 의혹을 유발하지 않는 수준에서 영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보통 시민의 삶을 유지할 정도의 경제생활은 가능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좋은 주택과 분에 넘치는 자동차와 거액의 사례비로 호화롭게 사는 것도 안 되지만 찢어지게 가난하여서 궁상을 떨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로 들립니다. 하지만 한국교회 목회자에게 평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교회마다 다른 기준으로 천태만상입니다. 특히 개척교회 목회자는 불가피하게 이중직으로 내몰리고 있어 보기에도 딱합니다. 한국교회 목회자의 사례비를 평균적으로 산출하지 못하는 이 땅의 교회가 천국 복음을 설교한다는 사실이 어색합니다.
“예언자 수련생들의 아내 가운데서 남편을 잃은 어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으며 호소하였다. ‘예언자님의 종인 저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예언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빚을 준 사람이 와서, 저의 두 아들을 자기의 노예로 삼으려고 데려가려 합니다.’”(4:1)
엘리사 시대의 예언자 지망생도 가난했습니다. 그들은 부자가 되기 위하여 선지학교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길이 가장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의 타락은 이런 기본이 무너지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목회자도 생활비가 필요합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주님을 전심으로 경외하면서도 반듯한 삶을 이을 수 있는 은총을 주십시오. 기본소득이라도 실현되게 이끌어 주십시오.
2024. 9. 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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