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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신
예레미야 애가 3:19~39
<예레미야 애가>를 기록하는 시인의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시인의 상실감은 곧 유다 백성의 심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었던 하나님의 왕국 유다가 바빌로니아의 말발굽에 속절없이 망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훼손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과녁 삼으셨다고 슬퍼합니다. 하나님이 평안과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셨다고 토로합니다(3:12~18). 시인은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3:19~20)고 아픈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시인이 하는 말은 원망과 불평과 절망만은 아닙니다. 그가 쏟아내는 절망의 시어는 수치와 자책의 표현인 동시에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3:21~22)
시인에게는 ‘그러나’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식이란,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보는 안목이며, 번영과 성공의 자리에서도 우쭐하지 않고, 절망과 실패에서도 주눅들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빈약한 것이 바로 ‘그러나’ 정신입니다.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교만하고, 약자의 설움을 본체만체 하기 쉽습니다. 세속화의 길을 거침없이 걸으며 뒤돌아볼 줄 모릅니다. 은혜로 누리는 즐거움을 마치 자기 능력인 줄 착각합니다. 작은 실패 앞에서 하늘이 무너진 듯 낙담합니다. ‘그러나’ 정신이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큰 성공에도 겸양할 수 있고, 작은 실패에도 초연할 수 있는 지성과 믿음은 ‘곰곰히 생각’하는 ‘그러나’ 정신에서 기인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3:23)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3:24)이라고 소리칩니다. 성공 너머의 슬픔을 보고, 실패 다음의 영광을 바라보는 ‘그러나’ 정신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뜻에 조금이라도 더 근접하게 되지 않을까요?
주님, 저희가 영광 중에 있을 때일수록 자기를 점검하고 겸양한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혹 절망 중에 빠지더라도 희망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주십시오.
2024. 10. 2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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