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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3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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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30절-32절: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찌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30절: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이들이 예수님께서 어디에 사는 것도 알고, 예수님의 부모 형제들도 알고, 또 예수님이 어려서부터 자신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도 예수님의 말인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냈다고 하니 예수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들리고, 또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이적 기사를 행하면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하시니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저희가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지만 못 잡았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의 몸을 붙잡으면 그 사람을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설령 사람의 몸을 붙잡았다고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을 붙잡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을 붙잡지 못한 거다. 사람이 짐승을 붙잡으면 잡았다고 하지만 사람의 세계에서는, 특히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렇게만 보면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야 그 사람을 붙잡은 거다.
신앙 면에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붙잡는 것은 무기를 가지고는 안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이치로 붙잡아야 잡히는 거다. 그리고 반대로 자기가 주님을, 진리를 붙잡는 것은 진리말씀을 귀로 들으면서 바른 판단을 해서 세상을 붙잡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 한 잡지를 못한다. 옳은 지식을 붙잡으면 세상 것은 자동적으로 놓게 된다. 이러면 사람이 홀가분해지고, 홀가분해지면 기쁘고 즐겁고 사는 맛도 난다. 세상의 짐, 종교적인 짐, 세상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면 힘들고 피곤하다.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려면 사람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을 모르면서 가르치게 되면 사람을 완전히 죽이게 된다. 마지막 시대에는 교회에서 거짓 종들이 이런 일을 한다. 창조의 목적관에서 보면 이건 저주다. 거짓 종들은 교훈을 통해 사람을 물질 밑으로 들어가게 해서 고통의 삶을 살게 한다. 사람이 땅을 밟고 서야 편안하고, 달릴 수도 있고, 앉을 수도 있는 건데 왜 사람을 물질 밑으로, 땅속으로 들어가게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하셨는데 율법사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안식일이라고 해도 병자나 불구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 사람이 편안해진다. 무당이나 점쟁이는 마귀 짓이고 악령의 짓인데, 이들이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너에게 신이 내렸다. 그러니 무당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할 때 이 말을 듣고 무당이나 점쟁이가 되면 이 사람이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하겠느냐? 이렇게 되면 평생을 악령에게 끌려다니게 된다. 이건 완전히 저주다.
유대 율법사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거스리고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눈만 뜨면, 모이기만 하면 예수님을 잡아 죽일 기회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내밀어서 예수님을 붙잡는 자가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런 거냐? 예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이 말이 예수님께서 붙잡힐 때를 당신이 결정을 한다는 거냐, 사람들이 결정을 한다는 거냐? 예수님 당신이 결정을 한다는 거다.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자이신데 온 세상이 다 달라붙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는 거냐? 예수님께서 허락지 않으면 천하가 다 달라붙어도 붙잡을 수 없는 거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의사에 적중성으로 들어간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이 이 성도를 붙잡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믿는 우리는 이룰구원 면에서 주님과 의사단일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주님을 붙잡을 수 있다. 이 성도가 예수님께 부르짖으면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멈추신다. 즉 우리가 금 대접에 들려 올라가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
믿는 사람이 이방인들의 정신 사상의 사고방식으로 세상 것을 구하면 주님께서는 이런 기도는 안 들어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주러 오신 게 아니다. 물질은 자타의 구원에 얼마든지 쓸 수 있도록 이미 다 만들어 놓았는데 왜 물질을 구하느냐? 기독자가 물질을 구하면 게으름뱅이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는 것은 신앙 믿음이 아니다. 이방종교는 귀신장난이고 마귀장난이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점쟁이나 무당은 짓밟는 거다. 그런 것을 부러워하거나 겁을 내면 그런 정신이 들어온다. 그 정신에 잡히면 무당이 된다.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지금 예수를 붙잡으면 민중의 난이 일어나니 안 된다고 하는 거지만 그것은 인간들의 생각이고, 예수님은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몸이 잡혀주거나 안 잡혀주거나 하시는 거다. 설령 육신이 그들에게 잡힌다고 해도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과 천국복음까지 잡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들에게 잡히면 자신들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예수를 붙잡은 것으로 알겠지만 절대로 그게 아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물질에 속하지 않고, 사망과 죽음을 다 이겼으니 죽음과 상관이 없는 분이다. 그리고 만물을 만드신 창조의 능력자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상만사를 보존 섭리하시는 만능의 능력자이신데 이 분이 무리에게 잡히는 것은 당신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잡혀주시는 거다. 인간은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고 해도 죽음에는 다 붙들려 간다. 죽음을 못 이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다.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은 사단 마귀의 중심을 훤히 보신다는 거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죽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한다는 것은 믿는 우리에게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라는 의미다. 온 세상이 다 일어나서 예수님을 잡는다고 해도 잡혀주고 안 잡혀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당신의 뜻에 따라 하신다. 반면에 단 한 사람이 구원을 위해 당신을 붙잡으려고 하면 기꺼이 붙잡히신다. 놀라운 일이다. 예수 믿는 우리가 주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감찰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직감한다면 감사가 안 나올 수가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당신의 뜻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이런 분을 우리가 믿는 거고, 신앙하는 거고, 우리는 이 분의 자녀다. 우리의 신앙은 이 분과 직결이 되어서 자체화 되고 실상화 되는 거다. ‘빌면 들어주고 안 빌면 안 들어주고’ 이런 차원에서 놀지 말아라.
31절: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찌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는 말이 ‘미래적으로 그리스도가 와도 지금 예수님이 행하는 표적과 이적 기사보다 많겠느냐?’ 라고 한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눈으로 보여진 이적 기사 등의 나타난 것을 보고 이렇게 말을 하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영의 눈을 가지고 영적인 면의 이적 기사를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대부분 그렇지 않고 눈으로 보여지는 신비스런 것이나 세상 물질적인 것을 보고 믿는 사람이 많다.
예수를 믿다 보면 정신도 고쳐지고, 마음도 고쳐지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기의 육신의 병이 어느 새 도망을 가기도 한다. 믿는 사람이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해서 육신이 나았다고 증거를 하게 되면 자기의 자랑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영적으로 고쳐진 것을 증거한다면 이것은 주님의 신령한 역사를 드러내는 거다. 교인들이 무엇을 말하느냐에 따라 자기 자랑도 되고, 주님 자랑도 된다.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찌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 알고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까지도 모르고 있다. 오늘날도 이런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으냐? 앞으로 가면 갈수록 예수님을 모른 채 예수를 믿을 사람이 더 많아질 거다. 왜냐? 주님께서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모른 채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적과 기사를 찾게 된다.
믿는 사람이 가치 판단적으로 따질 때 육신의 몸이 빨리 낫는 게 좋으냐, 그것보다 먼저 영적인 면이 온전케 되는 게 좋으냐? 어느 게 먼저냐?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기도가 나오게 된다. 육신 쪽으로 치우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병든 자기의 정신은 그대로 둔 채 육신 쪽으로만 나간다. 사람이 육신은 건강하지만 정신이 썩어빠졌으면 희망이 없다.
구약에서 누구의 아들이 절름발이였느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다. 다윗이 므비보셋의 아버지와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므비보셋을 자기 식구처럼 챙기고 존귀히 여겼다. 므비보셋에게 시바라는 종이 있었는데 이 종은 사대육신은 멀쩡했으나 간사하고 교활했다. 므비보셋이 시바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겼는데 다윗을 만나서 절반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사람을 바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함을 알 수 있고, 자기 집의 종을 잘못 다스리면 주인이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절: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무리가 예수님께 대하여 수군거린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생길 징조다. 무리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듣고 예수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 수군거린 자들은 그러잖아도 예수를 잡을 기회만 찾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을 잡을 꺼리를 준 셈이다.
교회생활을 할 때 같은 교인들끼리 쓸데없는 말이 오가게 되면 온 교회만 아니라 이웃교회까지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덕이 안 되고 구원이 안 되는 소리가 들려오면 귀를 막아라. 그리고 말씀을 듣고 자기를 고쳐가는 일에만 힘을 써라. 자기를 고치면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다. 계속 이렇게 나가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교인들에게도 사랑을 받게 된다.
무리의 수군거림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협동하여 하속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잡게 했다. 목회자가 교인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영향을 받아서 교회를 인도하면 안 된다. 목사가 주님을 자기의 종으로 삼고 자기가 주인이 되면 교회가 잘 돌아가겠느냐? 좁혀서 교인이 자기가 소원하는 세상 것을 주님께 들어달라고 한다면 이것은 교인이 주님을 자기의 종으로 삼고 이용해 먹는 거다. 교회는 진리가 주격이 되어야 한다. 목사님 속에 진리가 없으면 교회가 진리에 서지 못한다. 이러면 이 교회는 교인들이 주격이 되어서 돌아가게 된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마음이 더 들도록 미끼를 던져준 자들이 있다. 누구냐? 이적 기사와 요행만 바라보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에 대해 떠드는 말이 하나님을 욕먹도록 하고 예수님을 핍박하게 하는 요인이 된 거다. 쉽게 말을 하면 예수 믿는 교인들이 잘못하면 전도 문도 막히고 주님이 욕을 먹는다. 자기가 바로 알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해 떠들어 대면 예수님이, 목사님이, 교인이, 교회가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주권에 의해 직접 핍박을 당하는 것과, 교인들이 잘못해서 주님이 핍박을 받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예수님의 마음이 더 아플까? 당신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원적으로 죽는 게 마음이 아프겠느냐, 교인들이 잘못해서 당신이 욕을 먹는 게 마음이 더 아프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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