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전03.jpg

[신학대전3권]하나님의 작용과 위격 

 

토마스 아퀴나스<신학대전>1부 제3권 (20-30)

S.T Aquinatis 지음/정의채 옮김

500쪽 34,000원 바오로딸 1994, 2023

 

20.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21.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대하여

22.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23.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24.생명의 책에 대하여

25.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26.하나님의 지복(행복)에 대하여

27.하나님의 위격들의 발출에 대하여

28.하나님 안에서의 관계들에 대하여

29.하나님의 위격들에 대하여

30.하나님 안에서의 위격들의 복수성에 대하여

 

20.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①하나님 안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정념(격정)이며, 사랑과 기쁨과 쾌락은 감각적 욕구가 인간의 심장에 작용하는 상태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인간의 심장과 같은 감각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16)는 말은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작용이 인간에게 사랑으로 느껴진다는 말이지, 하나님 안에 사랑의 감각이 존재한다는 말은 아니다.

②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랑하는 자를 향하여 자기 밖으로 나가 어떤 의미로 그가 사랑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자기 밖에 놓여 있는 어떤 대상으로 자기의 감정이 나간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과 밖이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로 사랑이란 ‘욕구’인데 하나님은 비이성적 피조물에 대한 욕구가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③하나님은 모든 것을 균등하게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욕구적인 사랑과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태양처럼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태양 빛을 받는 것은 받는 사람이 처한 환경과 조건에 따른 것이지 태양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④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더 사랑하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류를 항상 더 사랑하신다. 모든 인류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21.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대하여

①하나님 안에는 정의가 없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런데 본질을 정의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正)은 본질에 관련된 것이지만 의(義)는 행위에 관련된다. 고로 ‘하나님 안에 정의가 있다’라고 할 수 없다.

②하나님의 정의는 진리가 아니다. 안셀룸은 “정의는 인간의 의지 안에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의지의 올바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는 정의와 다른 어떤 덕행이다”라고 했다. 진리는 정의의 개념(본질)에 속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진리이다’라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③자비는 하나님께 적합하지 않다. 그 이유는 자비는 슬픔의 일종이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는 슬픔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는) 자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④하나님의 모든 작업에 자비와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심판하실 때, 여러분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약2:13)와 같이 하나님은 ‘모든 일’에 무조건 자비와 정의를 베푸시는 분은 아니다.

 

2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①섭리는 하나님께 적합하지 않다. 키케로는 ‘섭리는 지혜의 일부이다’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는 숙고하여 좋은 의견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의견(자문)을 받아야 할 어떤 의문도 갖고 계시지 않으시다. 

②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처음에 사람을 만드시고 ‘자유의지’를 주어서 스스로의 결정으로 살게 하셨다. 그래서 특히 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유의지로 죄를 선택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욕망을 따라 그들을 버려두셨다.’(시80:13)고 하신다. 그러므로 ‘오 마이 갓, 아이고 하나님, 하나님도 무심하시지...’이런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기는 말은 옳지 않다.

③하나님은 모든 것을 직접 섭리하시지는 않으신다. 어떤 왕에게 신하와 백성들이 있다면 그 왕의 통치는 그들을 잘살게 하든지 고통을 받게 하든지 그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것은 왕의 섭리에 속하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섭리가 신하와 백성들에게 미친다고 볼 수 없다. 

④하나님의 섭리는 섭리 된 사물들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모든 결과는 어떤 원인이 과거에나 현재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선재(先在)한다. 결과는 이런 원인을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헛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3. 예정(豫定)에 대하여

①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지(豫知)하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豫定)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무엇을 선택할지까지 예정해 놓으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자유의지라 할 수 없다.

②예정은 예정된 자 안에 어떤 것을 조정(措定)하는(놓아주는) 것이다. 모든 능동적인 행위는 그 자체로 수동을 예상한다. 그런데 예정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능동적인 행위라면 예정은 예정된 자들에게는 수동이어야 한다. 

③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배척하지 않으신다. 아무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이 만든 것들 중 어느 것도 미워하지 않으신다.(호13:9) 

④예정된 자들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 선택되지는 않는다. 태양은 모든 물체에 빛을 쏟는다. 하나님도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예정하셨다.(딤전2:4) 그런데 모든 물체가 태양 빛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이 예정한 자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면 그를 선택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선행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시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구원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 붙잡지는 않으신다.

⑤공적(功績)들의 예지(豫知)가 예정의 원인이다. 공적이란 노력과 수고를 들여 이루어 낸 결과인데, 하나님이 그 사람의 공적을 미리 아시는 것을 예지하신다. 그래서 그 결과로 예정하신 것이다. 

⑥예정은 확실하지 않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1) 예정의 결과인 면류관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은 예정이 확실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⑦예정된 사람들의 수(數)는 확정적이다. 그러나 형상적으로는 확정적이지만 질료적으로는 확정적이 아니다. 예를 들어 100사람, 1000사람이라는 숫자는 확정적이지만 그 숫자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사람이었다가 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원래는 저 사람이 아니었는데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마11:12)이라 천국을 쟁취한 사람이 숫자 안에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⑧예정은 성인들의 기도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시간적인 것이 영원한 것을 앞설 수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이미 흘러 가버린 물을 흘러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24. 생명의 책에 대하여

①생명의 책은 예정과 같은 것이 아니다. 생명의 책은 ‘구약과 신약’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어떤 힘이다.’ 하나님의 힘은 ‘예정’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능력’의 속성에 속하는 것이다. 

②생명의 책은 다만 예정된 자들의 영광의 생명에만 관한 것은 아니다. 생명의 책은 생명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통해 다른 모든 생명을 인식하신다.

③어느 누구도 생명의 책에서 말소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틀릴 수 없는 하나님의 예지가 생명책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생명책은 불가변적(不可變的)이기 때문에 말소 불가능 상태이다. 

 

25.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①하나님 안에는 능력이 없다. 그 이유는 능력이란 ‘작용의 근원(원리)’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작용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는 우유(偶有)혹은 우유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력의 개념은 하나님께 적합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안에는 능력이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 없다.

②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무제한한(무한한)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불완전한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할 수 없다.

③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시다. 그 이유는 전능(全能)이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능동태(움직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움직이는 물체가 아니고 영이시기에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전능’이란 상위(上位)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 자체가 최상위(最上位)이며 그 위가 없기에 하나님을 ‘전능하시다’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④하나님은 과거에 있었던 것들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으시다. 하나님께는 시간이라는 흐름이 없으시다. 과거도 현재이고 미래도 현재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나누어져 있지 않고 그냥 합쳐져 있기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으시다. 

⑤하나님은 그가 행한 것 이외의 것들은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스스로가 행할 것을 미리 알고 미리 질서지어 미리 배정해 놓았기 때문에 그것 이외에 다른 것들을 할 이유가 없으시다.

⑥하나님은 그가 행하는 것들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장 큰 능력으로 가장 좋은 것을 이미 하시기 때문에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6. 하나님의 지복(至福, 행복)에 대하여

①지복(至福)은 하나님께 적합하지 않다. 그 이유는 지복이나 행복은 ‘덕의 보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덕을 행하여 누구에게 보상을 받는 분이 아니시다.

②하나님이 지복(至福)하다는 것은 지성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지복은 존재에 관한 것이고 존재는 본질에 따른 것인데 하나님은 ‘본질’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복은 ‘지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③하나님은 각기 지복한 자의 지복이다. 하나님은 ‘최고선’이다. 최고선이라는 것이 지복의 개념(성격)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지복은 하나님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각기 지복한 자의 지복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④ 하나님의 지복은 모든 지복을 포함하지 않는다. 지복(행복)도 어떤 것들은 거짓이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는 어떤 거짓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복은

모든 지복(행복)을 포함하지 않는다. 

 

27. 하나님의 위격(位格)들의 발충(發出)에 대하여

①신적(神的)인 것들 안에, 즉 하나님 안에는 어떤 발출(출발,시작,기원)도 없다. 그 이유는 발출은 밖을 향하는 운동인데 하나님 안에는 움직일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또 외부적인 것도 없다. 그러므로 발출도 없다.

②하나님 안에서의 어떤 발출을 출생이라고 할 수 없다. 출생이란 비존재에서 존재로의 변화이며 부패,소멸에 반되된다. 그리고 이 둘의 출생과 소멸의 기체는 질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체가 아니므로 하나님께는 출생이 있을 수 없다.

③하나님 안에 말씀의 출생 이외의 다른 발출은 존재하지 않는다. 발출은 발출을 낳기 때문에 발출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부적합하다.

④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의 발출은 출생이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의 양태로 발출하는 것은 본성의 유사성 안에서의 발출이기 때문에 출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⑤하나님 안에 둘 이상의 여러 발출들이 있다. 하나님께 지식과 의지가 귀속되는 것과 같이 능력도 귀속된다. 그러므로 지성과 의지에 근거하여 하나님 안에 여러 가지 발출들이 있다고 인정된다.

 

28. 하나님 안에서의 관계들에 대하여

①하나님 안에는 어떤 실재적 관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같은 것의 같은 것에 대한 관계와 비슷한데, 이는 개념상의 관계일 뿐, 실제로 하나님이 세 가지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고로 하나님 안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②하나님 안에서의 관계는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최고로 절대적이고 그 자체로 자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③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관계들은 실재적으로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이고 같은 것에 동일한 것들은 그 어떤 것이든 다 같은 것이다.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④하나님 안에는 네 가지 실재적 관계들, 즉 부성(父性)과 자성(子性)과 영기발(靈氣發)과 발출(發出)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29. 하나님의 위격들에 대하여

①위격의 정의 -보에티우스가 ‘위격(인격)은 이성적 본성의 개별적 실체이다’라고 한 위격의 정의는 적합하지 않다. 그 이유는 어떠한 개별적인 것을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런데 위격(페르소나)는 개별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②위격은 ‘자주체(自主體)’와 ‘자립체(自立體)’의 ‘본질’이 같다. 우리가 하나님 안의 세 위격을 말하는 것처럼 세 자립체를 말한다. 이것은 위격이 자립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③위격(인격)의 명칭은 하나님께 쓰일 수 없다. 초실체적인 숨겨진 신성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표명된 것들 외에는 보편적으로 감히 말하거나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한 위격의 명칭이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표명되지 않으므로 위격(인격)의 명칭을 하나님께 사용하면 안 된다.

④‘위격’이라는 이 명칭은 하나님 안에서 관계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실체를 보시하는 것이다. 

 

30. 하나님 안에서의 위격들의 복수성에 대하여

①하나님 안에는 복수의 위격(인격)은 없다. 위격은 이성적 본성의 개별적 실체이다. 만약 하나님 안에 복수의 위격이 존재한다면 하나님 안에 또 다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 

②하나님 안에는 인격으로서의 위격은 오직 하나이지만 관계에서는 네 위격들이 있다. 즉, 부성(父性)과 자성(子性)과 영기발(靈氣發)과 발출(發出)이다.

③수사(數詞)들은 하나님 안에서 어떤 것을 규정한다. 하나님은 하나(一)인 것이 그의 본질이다. 그런데 수는 일성(一性)의 반복이다. 그러므로 모든 수사는 하나님 안에서 본질을 표시하며, 하나님 안에서 어떤 것을 규정한다. 

④ ‘위격’이라는 이 명칭이 세 위격들에 공통될 수는 없다. 위격이라는 명칭은 직접적으로 본질을 표시하지 않기에 세 위격에 공통되지 않는다. 

-요약,정리-최용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