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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3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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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32절-34절: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32절: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무리가 예수님께 대하여 수군거리는 게 바리새 교인들에게 예수님을 잡을 꺼리를 제공한 셈이 됐다.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무엇에 대해 수군거리느냐?? 좋은 거면 내놓고 광고를 하겠지만 수군거린다는 것은 뭔가가 좋지 않은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누구에 대해 좋지 않은 것으로 수군거리게 되면 이게 커지고 커져서 당을 짓게 되고, 이렇게 되면 교회 안의 공기가 험악해진다. 말하자면 교회에 시험이 되고, 이쪽저쪽이 패를 지어 싸우게 된다. 이게 무슨 꼴이냐? 교회 안에서 수군거리게 되면 반드시 무리를 짓게 되고, 이러면 다른 무리와 싸움이 나게 된다.
진리이신 주님은 백성들이 듣도록 드러내놓고 복음을 전하셨다. 즉 주님에게는 숨길 게 없고 죄가 될 게 없다는 거다. 좋은 말씀은 내놓고 말을 해야, 들리게 말을 해야 사람들이 듣고 각자가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 분별해서 진리를 취하게 된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수군거리는 무리의 소리를 듣고 협동을 해서 하속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잡게 했다. 예수님에 대해 수군거린 무리가 이들에게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미끼를 던져준 거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도 사단 마귀에게, 혹은 거짓된 교인이나 이단자들에게 미끼가 될 수 있는 수군거림이 많다. 하나님이 욕을 먹게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핍박을 받게 하는 요인이 많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욕을 먹듯이 예수 믿는 사람이 잘못하면 예수님께서 욕을 먹는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잘못해서 욕을 먹고, 얻어맞고, 고생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이 시끄러운 거고, 세상에 법이 있는 거다. 그러면 천국은 어떠냐? 천국에 경찰이 깔려 있겠느냐? 천국에 법이 있겠느냐? 천국에는 성경이 없다. 천국에서는 각자가 이 땅에 살면서 의의 사람으로, 선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대로 마음대로 하는 곳이다.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눈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없다. 가정도 이렇다면 가정천국이다.
33절-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망을 간다는 게 아니라 부활 승천을 의미한다.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오시는 것도 가시는 것도 당신의 마음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기도 하고 가시기도 한다는 거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예수님께서는 질적 차원적으로 다른 세계로 가신다는 것을 말씀하심인데 이들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면 지금의 우리는 이 말씀을 알아들었느냐? 그 때 당시에는 아직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지금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알고 있으니까 이 말씀을 믿느냐? 과거에 성경말씀대로 효력이 발생했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 효력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게 없다면 어떻게 된 거냐?
인간세계에서 ‘영원히 영원히’ 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인간들이 쓰는 ‘영원히’는 땅에 속한 개념의 말이기 때문에 영적 신령세계의 ‘영원히’가 아니다. 14:에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라고 하셨는데, 이곳에서의 ‘영원히’와, 사람들이 말하는 ‘영원히’는 말은 비슷하지만 하나는 영에서 나온 거고, 하나는 육에서 나온 거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히’는 시간과 물질을 초월한 ‘영원히’이고, 세상사람들은 물질적인 개념으로 당장 행복하고, 이 행복이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서 ‘영원히’ 라고 하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이치를 깨닫지 못해서 물질적인 개념으로 ‘영원히 영원히’ 하고 있다.
인본주의 교회는 너나 나나 다 인본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교회에서는 성경을 몰라도 교회의 제도를 타고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목회를 하게 되면 가면 갈수록 힘들어진다. 마음으로는 오로지 주님의 말씀만 따라 목회를 하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겠지만 가면 갈수록 사방에서 조여오는데 자기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본질로 무장이 안 된 채 하나의 종교인으로 무리화로 되어서 사는 것은 가인의 길이다. 현재에서 구별 분별을 못하고 세상의 바람을 타고 있으면 이 사람의 미래는 턱도 없는 거다. 먹고 산다고 해서 사람이 사는 거냐? 천국복음은, 기독교회는 시간의 개념에 드는 게 아니고 세상의 바람을 타지 않는다. 우리의 이룰구원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뤄야 하고, 이뤄진 것은 영원하다. 그런데 이것을 목적으로 하고 사는 교인이 몇 명이나 될까?
유대인들은 영도, 천사도, 부활도 믿는다. 그런데 신앙의 질은 물질적인 개념이다. 11:에서 예수님께서 자주 들렸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나사로가 병이 들어서 죽은 지 나흘이 됐다. 나흘이 되면 부패가 되기 시작이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부활을 믿는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아난다고 하니까 당장 살아나는 것은 믿지 않고 마지막 날 부활할 때 살아날 것이라고 하며 울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지금 살아난다고 하시는 건데 마르다와 마리아가 이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셨는데, 이것을 우리의 이룰구원으로 보면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이 지금 말씀을 따라 살면 지금 이룰구원이 이뤄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러면 주님께서 통분히 여기신다. 무슨 말이냐? 오늘날 교인들이 이룰구원 차원에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는 것을 모르는구나.
믿는 사람이 현재에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는 삶을 사는 게 이룰구원이요,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되는 건데, 현재를 놓치고 미래만 쳐다보게 되면 신앙인 것 같으나 예수 믿는 효력을 못 본다. 어린아이가 현재에 키가 자라지 않으면 부모가 염려 걱정이 된다. 지금 안 자라는데 미래에 자란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현재의 이룰구원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물질 충성봉사로 요란을 떨어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만 서면 어디를 가도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신다.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문제는 믿는 사람이 자기가 이질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모른다는 거다. 이건 스스로 속는 거다. 내가 주님의 성품으로 자체화가 되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라는 것은 그냥 따라오는 거다. 자기의 현실에서 속사람이 하나님의 본질로 되는 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영인성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게 자기의 참 실상인데 이것을 모른 채 믿는 사람이 많다.
일반사람들은 ‘내가 내 마음도 모르는데 내가 너를 어찌 아느냐?’ 라고 하는데 성경은 나를 알게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본질을 모르면 자기의 신앙이 어디에 있는지 신앙의 위치와 색깔을 모른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시면 ‘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해야지 ‘내가 숨었나이다’ 라고 하면 안 된다. 물질 뒤에 숨고, 집 뒤에 숨고, 자동차 뒤에 숨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의 신앙의 질이 한 마디로 ‘세상 뒤에 숨었나이다’가 되는 거다.
신령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진 게 들어간다. 이게 자기의 참 실상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기의 참 실상인 영능의 실력은 늙지 않고 영원하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영적인 면에서 자라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면 어린아이와 같을 것인데, 이 말은 어린아이처럼 기어 다닌다는 게 아니라 통치하고 관리하고 누리는 면이 인간의 표현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미달이라는 거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은 한 분인데 인간 각자가 보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 가정에 자식이 많으면 자식마다 아버지를 대함이 다르듯이 다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각자의 신앙이 아브라함의 신앙, 이삭의 신앙, 야곱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불러서 횡으로 서게 하고,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작자의 신앙의 성질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뒤로 서라고 하면 반드시 세 분 중에 한 분의 뒤로 서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의 뒤에 서는 게 제일 좋겠느냐? 아브라함이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니까 말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지길 원한다고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자기가 된 대로 그 분의 뒤에 서는 거다. 왜냐? 자기의 신앙의 질과 맞는 곳에 가서 서게 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성이 뭐냐?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듣고 새벽같이, 아침 일찍이, 듣는 즉시, 당장 떠났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의 길을 간다. 그래서 명령만 내리면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간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말씀을 붙잡고 갔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는 신앙의 후손들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자’ 라고 한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후손이 되면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축복이 이 사람에게도 계속 내려간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제물이 되었는데, 제물이 되기 위해 자기를 태울 나뭇단을 짊어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다. 이삭의 신앙의 후손이라면 이삭과 같은 길을 간다. 그런가 하면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위골 되었다. 야곱의 신앙정신을 받은 후손들도 전부가 환도뼈가 그 모양이다. 환도뼈가 위골이 되면 가만히 서 있을 때는 환도뼈가 위골이 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멀쩡해 보인다. 그런데 걷게 되면 절뚝이가 된다. 그러니 걷는 게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앙 중에 신앙의 질이 제일 보기 흉한 게 야곱의 신앙이다. 오늘날 자기의 신앙의 질이 야곱처럼 절뚝발이는 아닌지?
야곱은 꿈에 본 자기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부모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였다. 또한 삼촌 집에서는 삼촌도 속였다. 그러다가 야곱 자신이 자식들에게 속기도 했다. 거의 전 생을 이런 식으로 살다가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내가 살아온 것이 험난했다’ 라고 했다. 야곱 식으로 살면 결코 평안한 삶은 없다. 이게 다 우리 자신들의 얘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현상세계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현재에서 이뤄야 할 이룰구원을 가슴 깊이 느끼지 못한다. 오늘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삶을 살면 내일 그만큼 사는 자기로 나오게 된다. 오늘의 원인이 내일의 나의 결과가 된다. 출생을 해서 죽을 때까지 걸어간 자기의 삶의 걸음걸이가 결과적으로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자기인 줄 안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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