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7:38-44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38절-44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 말씀을 믿느냐? 자기의 배 안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느냐? 생수의 강이 뭐냐? 영원히 안 죽는 거, 어떤 상황에서도 변질이 없는 거, 먹을수록 살아나고 힘을 얻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정신과 사상의 교훈은 생수가 아닌 구정물이요 독극물이다. 따라서 세상의 정신과 사상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쉽게 동요 동화가 된다. 크고 작은 사건이 오면 쉽게 휘말린다. 이러면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서 스스로가 스트레스의 사람이 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명절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구원을 발견케 하려는 거고, 인간창조의 근본목적을 찾게 하려는 거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나게 하는 것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거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서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성을 하나님의 것으로 내리고, 그런 정신으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반대로 세상으로 충만한 사람이란 세상의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성 소원 목적 취미성으로 사는 사람이다. 이것은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본능으로만 사는 거다.
방송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면 전부는 세상을 행복하고 편하게 사는 방법에 관한 말이다. 전부는 땅에 관한 얘기요, 세상에 관한 얘기요, 물질에 관한 얘기다. 한 마디로 세상을 천국처럼 만들어 주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늘 변동되고 변질이 되는 곳인데 이런 세상을 붙잡고 살면 변질이 안 되는 영원한 행복이 있겠느냐?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상태라서 세상을 천국과 같은 환경으로 만들어 준다고 해서도 범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타락 이후에 일을 해야 살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저주 같은 축복이다. 일을 하는 것에는 건강도 들어있다. 그리고 저주 같은 이 말씀 속에는 우리의 구원의 이치가 담겨있다. 그러니 인간이 힘써서 일을 해야 살 수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주님을 믿을 때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되는 건데, 이렇게 살지 않고 인간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의 주관대로 할례받지 못한 생각을 따라 산다면 이 사람은 예수를 믿을지라도 생수의 강은 없다고 보는 거다. 성경은 남이 아닌 나에게 하는 말씀이다. 그냥 읽고 말 말씀이 아니라 내가 당신의 말씀대로 살면 나에게 효력이 나타나는 거다. 말씀 속에서 그 분의 의사성을 발견한 자는 자기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른다. 세상의 죽는 정신과 사상이 흐르는 게 아니라 생수의 강, 즉 살리는 정신과 사상이 흐른다. 이러면 자기는 말마다, 하는 것마다 살아나는 거다.
영육 결합체로 만들어진 인간은 몸과 이성이 주격이 아니라 영이 주격이다.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붙잡으면 이성은 영과 직통이 된다. 이런 상태가 되어서 영의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신 대로의 이룰구원이 되어진다. 그래서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은 안 믿을 때에 비해 완전히 바뀌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은 전부 사망으로 내려가지만 바꿔진 사람은 안 믿는 사람과 같은 세상에 살고, 같은 일을 하지만 마음중심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을 하건 전부가 살아나는 거다. 이룰구원을 바로 이루려면 생각부터 바꿔라. 바꿔지면 바른 사람이 된다.
생수의 강이 흐른다는 게 우리에게는 현재의 일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시니 지금도 예수 믿는 자기에게는 성령님께서 구원역사를 하신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역사를 체험도 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관장을 하시는지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속에서 영적인 면으로나 육적인 면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보고 가야 한다.
39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몸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이 정신적 사상적으로 돌고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저희에게’란 ‘제자들에게’ 라는 말이다.
이 말씀을 시간적, 역사적, 눈에 보이는 가견적인 관점에서 보면,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보면 이 말씀을 하신 지가 2천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믿는 사람이 아직까지 보혜사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이 많다.
보혜사 성령을 준다고 했는데 이미 받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 받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이유가 뭐냐? 한 마디로 예수님의 구원을 안 믿는 자들이 많다는 거다. 예수님의 존재성은 믿지만 그 분의 의사에 맞는 적중성의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을 하시기 전이라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않다고 하는데, 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전에도, 즉 구약 때에도 하나님의 신이 역사한 일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사건적 시간적 측면으로 보기보다는 신앙의 본질적인 면으로 생각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역사는 껍데기요, 비유요, 상징이요 비사다. 이 껍데기를 까서 보면 이 안에 변할 수 없는 정신 사상이 들어있으니 이것은 시대나 시간이나 지역을 초월해서 나에게 동시적으로 적용이 되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는 것은 표면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본질의 의사단일로 될 때 받게 되는 거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면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거다. 이게 성령의 역사를 계시적으로 보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가견적 현상적 비유적인 것으로 알고 있으니 이 생각 자체가 시간 속에 든 생각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시간 속에 살지만 그 사상은 시간과 상관이 없이 창조 때나, 마지막 때나, 현재나, 미래나 변치 않는 사상을 가져야 한다. 이게 성령의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사람,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성장을 할 수 있고 변화를 할 수 있는 거다. 이 면에 교회를 깨우치는 목사님들의 책임이 크다.
40절-41절: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 예수님에 대해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다’ 라고 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조상 모세의 예언을 기억하고 있는 거다. 모세가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훗날에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킬 거다. 그러니 그의 모든 말을 들어라’ 라고 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모세의 예언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이 모세가 예언한 분이라는 것을 믿는 자가 있었고, 또 예수님의 이적 기사를 보고 예수님을 알아주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의 이적 기사를 보고 알아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적 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 알아준다. 그런가 하면 남의 말만 듣고 분별없이 믿는 자도 있다. 우리는 한 쪽 말만 들으면 안 되고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
세상은 아무리 증인을 세워도 눈으로 보여지는 가견적인 기준을 가지고 증언을 하고, 또한 이런 증언을 듣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놓고 판단하고 구별을 하는 거다. 눈으로 보여지고 피부로 감각이 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판단을 하게 되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을 했는가?’ 하는 것을 모르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데, 이걸 빨리 느끼려면 그 사람의 평소의 생활이 어떤 정신으로 살았는지를 봐야 한다. 믿는 사람의 경우에 평소에 세상성으로 살았다면 이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잘 해 주더라도 그런 것에 속아서 믿음의 일을 같이 도모해서는 안 된다.
마리아가 ‘나는 사내 알지 못한다’ 라고 한 것은 ‘평소에 신앙정조를 잘 지키고 살았습니다’ 하는 표현도 되는 거다. 그런데 사람은 한 번 실수를 하면 자기 스스로 그 면에 대해 인격적인 면에서 치리가 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이 실수를 가슴에 안고 살게 된다. 이런 게 있어야 ‘내가 두 번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는 마음의 소리가 나오게 된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무리가 ‘예수가 그리스도다. 아니다’ 하는 문제를 두고 쟁론이 일어났다. 왜 이런 쟁론이 일어난 걸까? 첫째는 재산의 소유나 현재 살고 있는 지방의 수준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시골동네인 나사렛에서 어떻게 선지자가 나오겠느냐?’ 라고 한다. 사람이 순진한 것은 좋은데 지혜가 없는 순진성은 남에게 이용물이다. 그런가 하면 지혜는 없이 까진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사람 맛이 안 난다.
두 번째는 과거에 태어난 곳을 기준해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력과 업적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난 곳, 자란 곳, 일하는 곳이 있고, 한 곳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일을 하고, 그곳에서 죽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출생한 예수님께서 헤롯의 난을 만나서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가 십여 년이 흘러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이 다 죽었으니 나사렛으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꿈의 지시대로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살았다. 이곳에 살 때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이 내리자 요셉은 다윗의 집 자손이라서 호적을 하러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살고 있느냐? 그리고 부모로서 ‘자녀를 어디에서 길러야 자식이 거룩하게 자랄까?’ 하는 미래적인 꿈을 꾸고 있느냐? 자식을 하나님의 눈에 합격이 되게 기르려는 꿈이 하나님의 지시다. 이런 꿈을 꾸고 있다면 그 다음에는 어디에서 키워야 하겠다고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사람은 감염성이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다. 배우는 지식대로 인격이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집에서 거룩하게 자라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일에 쓰임이 된다면 큰 복이다. 반면에 나쁜 신앙지식이 들어가면 사람이 영원히 못쓰게 된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는 못 살지라도 생각은 고상하게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나사렛은 위치적으로 갈릴리 지방의 경계로, 갈릴리 바다에서 멀지 않은 작은 고을이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남쪽으로 훨씬 더 내려와서 사해바다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나오겠느냐?’ 라고 하는 것은 ‘유명한 사람은 학문이 있는 집안에서 나오든지 왕족에서 나오는 거지 가난하고 무식한 시골구석에서 나오겠느냐? 라는 거다. 이게 세상사람들의 생각이다. 이건 땅의 생각이요 하늘 아래의 생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인물은 못 사는 시골의 벽촌에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거다.
자기가 가진 게 없이 산 사람은 없이 사는 사람, 홀로 사는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없이 사는 고생을 수치로 여기지 말아라. 이런 게 다 자기의 인격이 다듬어지는 과정이다. 사람의 속성이 인격적으로 다듬어지는 재료들이다. 사건 환경에서 이런 게 없으면 자기의 마음이 풍부하게 다듬어지지 못한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모든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겪으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잘 다듬어져 나온다면 복된 사람이다. 세상적으로도 아무리 시골 벽촌에 살더라도 심성을 바로 가지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타락된 인간의 지식의 수준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 사람을 바로 알려면 성경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본질을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면 사람을 모르게 된다. 이러면 살아가면서 그만큼 실수가 많다. 세상을 보면 물질만 쫓다가 신세를 망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는 지식만 따라 살면 안 된다.
42절-43절: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서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 정도만 알면 안 된다. 가견적 시간적 족보적 역사적으로만 아는 것은 안식일에 회당 안에 있던 더러운 귀신들린 자도 이 정도는 안다. 우리는 가견적 역사적 족보적으로 된 이 속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봐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본질을 모른 채 육신적이고 세상적이고 임시적인 것을 좇는 신앙자들이 교회 안에서 판을 치다 보니 별 희한한 이단자들이 얼마나 많으냐? 어떤 자는 예수님의 아내가 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자는 이게 잘못된 주장이라고 반박을 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자는 갈:에서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라는 말씀을 들고 하늘의 어머니가 있다고 하는데,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어머니’ 라고 하는 것은 계시적으로 성도를 양육하는 것을 말하는 건데, 이걸 모르고 글자적으로만 보고 하늘의 어머니가 있다고 말을 하는 거다.
44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예수님을 잡는 것은 인간의 계획과 설계에 속한 게 아니다. 형사들이 범죄자들을 붙잡는 식으로 예수님을 잡는 게 아니다. 예수님 당신이 잡혀줘야 잡히는 거다. 형사가 범죄자의 몸을 붙잡으면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범죄자가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우기면 범죄의 증거를 찾지 못하는 한 증거 불충분으로 풀어줘야 한다. 이러면 그 범죄자를 잡은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것은 당신의 주권 섭리 하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집혀주실 때 잡히는 거다. 우리 주님은 만능의 능력자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잡는다고 해서 잡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잡혀주기도 하고, 안 잡히기도 하시는 거다. 내 구원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당신이 스스로 잡혀주시는 거냐?
만물의 창조도, 보존도, 인간의 역사의 섭리도 우리의 구원 때문이요, 예수님의 오심도, 살으심도, 고난도, 부활 승천도, 재림도 다 나의 구원 때문이요, 신령천국에서의 영능의 실력대로의 누림도 예수 당신의 주권에 있는 거다. 이걸 시인하느냐? 이런 모든 것이 선악과 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인간의 주권에 달린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힌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주권으로 잡혀주신 건데 그들은 ‘우리가 예수를 잡았다’ 라고 한다. 그들이 예수님의 몸을 붙잡았을 때 예수님께서 마음까지도 그들에게 잡혔다면 예수님은 부활을 못한다. 그런데 안 잡혔기 때문에 부활을 하신 거다. 예수님을 잡으려면 말하자면 예수님의 중심부터 붙잡아야 하는데 이들은 그럴 능력이 없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